최일남 칼럼-이건 비정의 극치구나
  • (본지 칼럼니스트 · 소설가) ()
  • 승인 1989.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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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이었다. 문교부는 이례적으로 도하 각 신문에 전5단짜리 광고를 내고 교원노조에 대한 입장을 큼지막하게 밝혔다. 관청이 스스로의 생각을 광고를 통해 전명하는 사례는 온당할지언정 나쁠 것이 없거니와, ‘선생님들의 노동조합결성은 이래서 옳지 않습니다’는 제목의 글 중에서 특히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나 윤리적인 측면에서 스승을 공경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 토막으로 된 광고문 중에서 유독 이 대목이 눈을 끈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네 항목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도 기왕의 문교부 주장을 요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교원노조 결성이 ‘스승을 공경하는 우리 사회의 미풍에 손상을 준다’는 소제목이 역설적으로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전교조를 그런 식으로 격파 분쇄하는 모양이 과연 ‘문화적으로나 윤리적인 측면에서’ 합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짙게 깔려있었다. 그것은 전교조를 찬성하고 반대하는 시각과는 일단 무관하다. 민주주의의 진면목은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고 누구나 말하는 것처럼, 스승을 다루는 방법은 더구나 ‘우리 사회의 미풍에 손상을 주지 않는’ 한계와 격조를 유지했어야 옳았다. 상대방이 아무리 밉더라도 교육의 이름으로 그걸 지키고 자제했어야 마땅했다. 전교조에서 탈퇴시키기 위해 해당교사와 가족 이간질에 나서고 동료끼리의 반목을 조장하며, 명령에 무력한 교장 · 교감에게 감시 기능까지 맡기는 따위 반교육적인 처사는 그 명분의 합법성 여부를 떠나 치졸하기 짝이 없다고 믿었다.

 

최소한의 인정과 체온마저 끊으려는가

그런데 지난주에는 또 그런 짓의 연장이 목격되어 문교부의 비정성을 재차 확인시킨다. 학교에 남아 잇는 동료들이 생계가 곤란한 해직교사들을 인간적으로 돕는 일마저 막으려 하고 있다. 교단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장외’까지 따라다니며 십시일반의 미풍조차 ‘불용’하겠다는 냉혹함 앞에서 교육은 얼어붙고 홍익인간의 이념은 증발한 셈이다. 말이 좋아 노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한 조치요 조사지, 각급 학교로 내려간 지시는 이미 그에 따른 인사조치와 책임을 함축하고 있다. 다른 곳도 아닌 교육의 장에서 최소한의 인정과 체온을 나누는 도리를 끊는 작태는 누가 가르쳤는가. 남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격인 무경위를 ‘행정의 寶刀’로 감히 결딴내도 되는 것인가.

제대로 된 풍토라면 어떤 이유에서건 현직에서 밀려난 동료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고, 일부러 찾아가거나 불러 국밥 한그릇이랄지 술 한잔을 사주는 게 이 사회의 미덕이다. 하물며 그 길이 옳다고 믿은 나머지 스스로 가혹한 처지를 선택했을진대, 개인적인 미움을 행정력에 편승하여 뻗칠 까닭이 없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 뜻을 함께 펼 수 없는 결 부끄럽게 생각한대도 좋고, 네 의견에 절대 동조할 수 없다며 돌아선대서 나쁠 것이 없다. 다만 한번 맺은 인연을 저버리지는 말자는 마음을 담아, 앞으로 무표정을 가장하고 뒤로는 심정적 연대를 확인한다 한들 법이나 그 무엇은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그게 인간의 정서고, 그것은 각 부처의 고위 퇴직자들이 낙하산줄을 타고 산하 유관기관에 내려앉는 것보다 낫다. 또한 아름답다. 자기들은 그렇게 유유상종으로 도우면서 월급을 털어 고생하는 옛동료와의 우의를 다지는 걸 차단하려는 행동이야말로 천덕스럽다.

 

명예가 재산의 전부인 사람의 인구너말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官이 나서서 사람과 사람끼리의 유대를 찾디차게 단절하는 조치와 술수를, 법을 앞세우거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적용하고 저지르는 일이 흔하다. 개폐가 논란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가 그렇고, 작금에 이르러 자주 발생한 학원 프락치사건이 그런 예이다. 현존하는 실정법이 그걸 요구하고 있는 이상 도리가 없잖으냐는 의무론이 전자를 대표하는 법리일 망정, 그 때문에 훼손되고 그늘진 국민감정의 상처는 너무 크다. 그러므로 찬양 · 고무죄와 함께 개정 보안법에서 이 조항을 없애거나 보안법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프락치는 더 말해 무엇하랴. 뒤에 숨어서 꼭두각시를 조작하듯, 돈과 약점을 빌미 삼아 한 인간을 윤리적으로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행위는 ,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모두의 심성을 마침내 황폐화시킨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은 30냥과 맞먹거나 그 이상의 금화에 팔려 누군가를 밀고하는 가롯 유다가 있어 義人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 세상살이의 내림이나, 의도적으로 그런 사람을 산출하는 ‘밀고사회’는 생각만 해도 무섭고 끔찍하다.

개인 차원에서 머물고 끝나야 할 ‘여자 문제’를 들먹여 특히 활동력이 강한 재야인사를 얽거나 우세시킴으로써, 그의 무대를 亡失케 하는 고전적인 수법이 등장한 것은 70년대 전후가 아닌가 싶다. 그런 사건의 첫 희생자라고 해야 할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퍽 소탈한 이 양반의 회고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연애를 했지요. 연애 안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은 여자쪽 조서를 먼저 받아놓았더라구요. 여자는 그 조서에서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나한테 미리 말했다는 겁니다. 남편없이 아들 하나만 있다고 해놓구선. 술집에 나오는 여자가 남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있습니까?”

어떻든 그분은 맡고 있는 단체의 회장직을 내놓으면 풀어준다는 교섭을 받았으나 거절했으며, 한달만에 무혐의로 석방됐으나 활동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이미 신문지상으로 성립된(?) 간통죄가 먼저 저만치 가 있는 바람에, ‘명예’가 재산의 전부인 그분으로서는 빼앗긴 인권을 되찾을 길이 없었다. 관여하던 단체가 하필이면 ‘인권’을 내세웠던 점도 기막히다.

안 그래도 구겨진 마음을 ‘행정의 다리미’로 곱게 펴주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더 꼬이게 만드는 못난 짓은 그만두자. 경우는 한참 다르지만, 암행어사 이몽룡의 춘향모의 ‘착각의 박대’를 당하고 부른 노래를 더 이상 부르게 하지 말 일이다.

“동냥은 못주나마 쪽박조차 깬다는 격으로 구박 출문이 웬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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