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언론 관폐?민페 여전
  • 박준웅 편집위원대리 ()
  • 승인 198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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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언론사가 ‘가짜 기자’양산…‘신문에 나면 골치 아프다’는 사회풍조도 문제

“지난 여름부터 ‘기자같지 않은 기자’들의 트집과 집적거리는 수작은 상당히 줄었디요. 그러나 발길은 끊이지 않습니다.” 수도권에 있는 ㅇ시청 ㄱ과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였다. 그는 이어 탁자 서랍을 뒤지더니 ‘낯선’언론사 기자들의 명함만을 골라냈다. 모두 11장이었다. 그는 올들어 찾아온 기자들의 명함을 다 모아 두었더라면 수십장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시청의 ㄴ과장은 탁자 위에 쌓인 신문들을 가리키며 “진짜, 가짜 가릴 것 없이 신문사도 기자도 너무 많아요”라며 짜증스럽게 답한 뒤 “공햅니다. 공해요”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법과 현실사이의 모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되는 문제를 일부 기자들은 언론이란 공기를 활용, 개선되게 하는 게 아니라 이를 악용합니다”라며 사뭇 흥분했다.

이 위성도시에는 수도권을 독자기반으로 5개 지방 일간지와 이 지역만을 겨냥한 4개 주간지가 발행돼 독자확보와 광고유치에 서로 경쟁을 하지 않을수 없게 돼 있는 형편이다. 여기에다 명함에 서울에 본사를 둔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 특정업종이나 분야(경찰?법률?청소년?식품?보건 등)의 전문지 지사 또는 파견기자까지 가세된다.

인구 60만명에 주거기능 중심의 소비형 도시인 이곳에 이처럼 언론사가 갑자기 난립하자 각종 폐해가 나타났다. 요즘 이곳의 내무부 산하 관공서, 공공기관 그리고 웬만한 기업 등에서는 골치를 앓는 일을 만나고 있다. 지방 일간사 두곳에서 펴낸 월간 사진잡지(월 구독료 3천원)와 전국체전사진집(정가 1만7천원)등의 구독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시청 ㄷ과장은“전국체전사진집을 발간한 신문사로부터 시청과 산하 동사무소 등에 1백권의 사진집을 팔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각 과?동단위로 협조를 요청한 뒤 민원창구 진열용으로 구입토록 했다”고 말했다.

이 도시에서 개인 의원을 경영하는 ㄹ씨(41)가 겪은 광고 떠맡기기 힁포의 체험담도 있다. “지난해 병원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완공된 뒤에도 한동안 준공검사필을 내주지 않더군요. 모 신문사 기자라는 남자가 찾아와 자기 신문에 광고를 내주면 준공필증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확인해 보니 건물의 신축과정에서 약간의 하자가 생겼는데 그 기자가 눈치를 채고 치근거린다는 거예요. 건물 등기를 서둘러야 할 처지이고 해서 2백만원 짜리 광고를 내주기로 했지요. 1백만원은 현찰도, 나머지는 할부를 조건으로 했습니다. 광고의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난 8월 이도시에서는 창간된 지 한달된 모 주간지가 이 지역의 상공업계를 대표한는 단체의 회장인 ㅂ씨를 비난하는 보도를 했다가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하는 등 파문을 일으켰다. 사실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주간지는 그 이후에도 몇차례에 걸쳐 ㅂ씨의 직권남용 등을 터뜨렸고 이곳 시민들은 그 귀추에 대해 비상한 관심과 흥미를 보여왔다. 그런데 이 주간지의 발행인 ㅁ씨가 지난 여름 시민들로부터 받았던 수재의연금 중 5백여만원을 유용했다가, 말썽이 나자 변상한 사실이 한 지방 일간지에 의해 얼마 전 보도됐다. ㅁ씨는 그 직후 잠적했고 중역 등 관계자들이 구속됐다. 이 상공단체의 홍보부장인 ㄱ씨는 “기자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이비들이 기자라고 돌아다니며 엉터리 기사를 쓴다”고 흥분하며 회장인 ㅂ씨와 관련한 일련의 보도는 허위이거나 위협용이라고 주장했다.

동국대 법대3년생이라 밝힌 ㅅ군(26)은 최근 이 지역의 언론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관청이나 기업들이 이것 저것 캐묻는 기자를 싫어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새 신문들이 나와 ‘알 권리’를 보다 폭넓게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좋은 점도 있습니다. 단 우려되는 것은 언론사나 기자의 위법행위, 허위 또는 왜곡보도겠지요. 이런 문제는 사법적으로 처리, 해결돼야 할 것입니다.”

언론사 난립과 사이비 기자의 힁포에 대한 시비는 이 도시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전국의 웬만한 중소도시에는 이와 비슷한 양상의 논란이 일고 있다는 것이 한국기자협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부실한 언론사를 만들어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언론사주에 의해 사이비 기자가 조장?양성되는 듯하다. 지난 4월 <한국 환경신문>의 폐간 무렵 이 회사 노조가 ‘사이비 강요하는 악덕사주 퇴진’을 요구한 사실에서도 반증된다.

사이비 기자의 노골적인 힁포가 상당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지난 봄 검찰이 사이비 기자에 대한 집중단속과 검거를 한 데 이어 7월 정부가 사이비 기자 사례집을 책자로 만들어 일선 행정기관에 배포, 유사한 사례의 적발시 상부에 보고토록 하는 조치를 취한 뒤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신문에 나면 골치 아프다’는 생각 때문에 사이비 기자의 요구에 쉽게 응하는 사회풍조가 있는 한 없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비민주적인 사회의 체제와 제도가 ‘사이비’의 온상이 되게 한다면 민주사회의 구현이야말로 ‘알맹이만 남고 껍떼기는 가라’의 요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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