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칼럼-80년대에 쓴 正史와 野史
  • (본지 칼럼니스트 소설가) ()
  • 승인 198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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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 正史고, 정확한 고증이나 전거없이 사사로이 지은 역사를 野史로 부른다는 걸 모를 사람은 없다. 따라서 후자는 다소 무책임한 이야기로 흘러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며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다. 혹은 野乘이나 外史로 표현하여 역사의 바깥에서 ‘따로 놀게 하는’까닭이 여기 있다.그러나 재미로 치면 야사가 정사보다 훨씬 낫다. 조선시대의 ‘대동대승’이나 ‘어우야담’등이 그렇고, ‘연려실기술’에 이르면 흥미있는 사실과 함께 명석한 史觀과 불편부당한 필치로 엮은 책이라 하여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뒤로도 야사는 많이 읽혔다. 기득권을 확보한 양반계층의 권세가들이, 어떻게 정쟁을 일삼고 민중들의 삶과는 무관한 위치에서 치고 겨뤘는가를 아는 데 도움을 주었다. 왕후장상의 인물평전이라든가 인정과 時俗을 이해하는 데도 제격이었다. 개화기 초 육당 최남선이 문고본의 효시라고 할만한 六錢소설을 간행한 것도 비슷한 취지에 서였다. 닷새장에 나갔다고 누런 표지를 입힌<임경업장균뎐>같은 책을 사가지고 와서, ‘언문’을 마스터한 마을의 식자꾼이 등잔불 밑에서 목청을 돋워 변사조로 읽어 내려가면 동네 할머니나 아녀자는 그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저런!” “쯔쯔" 소리를 추임새 삼아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런 시기는 대충 추수동장이 끝난 지금 같은 동지섣달이기 쉬웠다.

 

野史를 쓰는 시각으로 5공처리

 하지만 정사는 정사고 야사는 야사이다 .위정자는 모름지기 정사를 쓰는 몸가짐으로 매사에 당당해야 하며 맺고 끊는 게 분명해야 한다. 어물쩍 넘겨 시간을 벌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안겨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여론을 외면한다든가 쓸데없는 하중을 가산시키는 따위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민정당 정부의 5공처리 과정은 정사를 쓰는 자세가 아니라 야사를 쓰는 시각에서 영위되었다.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축내다가 저런 모양으로 서둘러 뭉뚱그린 양상이 그렇다. 진즉 마무리해서 될 일을 우유부단하게 미적거린 결과는 비단 ‘핵심인사 처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총체적으로는 일단 5공의 너울을 쓰고 밀려났던 인사와 세력들이, 이제는 기세도 등등하게 역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이 더 큰 문제다.

 따지고 보면 6공정부는 출범 이래로 내내 그랬다. 끝낼 일을 일찍 끝내고 새롭게 터잡은 場에서 할 일이 태산같은데도 또 다른 부담을 사서 안은 꼴이다.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다시 한팔을 붙잡힌 상태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이러다간 백담사의 전두환씨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아닌말로 엘바섬에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올 때의 모습과 근사할지 모른다는 ‘농담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모니퇴르>라는 신문이 불과 3주 동안의 나폴레옹 북상길에 맞추어, 살인마→마귀→괴수→폭군→보나파르트→황제폐하로 그의 호칭을 바꾼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해학의 수준에 머무는 과장법에 불과하지만 심정적인 우려까지 배제할 건 아니다. ‘백담사 이후’의 정국이 오늘의 시점에서는 그와같이 전개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하는 소리다.

 말을 바꾸면 그동안의 5공처리는 TK끼리의 싸움이었대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을 ‘볼모’로 잡아 청산을 시도할 양이면 차라리 시원하게 ‘끝내기’나 잘 할 일이지, 하고 많은 날을 두서너 사람의 문제를 놓고 자기네끼리 국민들의 머리 위에서 치고받은 허물은 너무 크다. 고래싸움이 아니 바에야 하물며 새우일 수 없는 국민의 등이 터질 리는 만무였으나, 명실공히 정치행위의 고삐를 휘어잡고 있는 집권당이어서, 그 때문에 당한 피해와 국력 소모는 막강했다.

 야사는 특히 확립된 민주언론이 없고 떠돌아다니는 허튼 말이 기승을 부리는 사회에 기생하는 게 보통이다. 당대에 규명되고 밝혀져야 할 사실들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있다가, 당사자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때에야 마음놓고 서술되게 마련이었다. 이미 과거의 휘장 속으로 숨어든 일을 옛날 소설을 대하듯 읽고 즐기는 데 그친다. 그러나 대명천지를 구가하는 사회에서 그럴 수는 없다. 사리가 그러한데도 발생한 지 10년도 못되는 일들이 여전히 감추어진 채 건망증에 기대어 베일 속에 가려진 상태는 불건강하다. 광주가 그렇고 삼청교육대가 그러하며 해직기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80년대는 그만큼 드러낼 것을 드러내어 정사의 햇볕에 말리지 않고, 여전히 ‘야사의 습지’에 던져둔 셈이었다.

 

3당 총재의 한계 목격하는 것 같아

 그것을 5공으로의 회귀나 연계로 파악할 수도 있다. 이만치 했으면 됐으므로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90년대에 대비하자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게 해서 재등장시킨 구태에 젖은 인물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놓여날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 정도의 ‘치유’를 내세워 이미 성과를 올린 것으로 간주할 공안정국의 재연을 더 강화한다면, 정작 상처를 치유받아 마땅한 사람들의 여전한 상황은 어찌할 것이냐 이거다. 경제는 날로 어렵고 내년에는 더욱 불투명한 조짐이 보이는 마당에서, 누군들 지난날에만 한눈을 팔고 앞으로 나가는 걸 주저하거나 마달 것인가. 하지만 숙제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발걸음에 가속도가붙기 어렵다면, 그 짐을 덜어주는 방법도 지혜롭게 생각하고 궁리해야 마땅하다. 마음만 먹으면 이 일은 돈 안들이고 수행할 수 있으며 박수까지 받을 공산이 크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또한달력을 떼고 거는 시한에 굳이 구애받을 것이 없다. 의잠 가드듬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개되는 상황은 여전히 함량 미달이다.

 어떻든 ‘대타협’이라는 이름의 여야 영수회담은 끝났으나 ‘역시’실망스럽다. 아무리 정치는 현실이라지만 ‘태산명동’의 마무리가 이정도라서야, 野史도 못되는 ‘夜史’를 쓴 느낌이다. 야당 3총재의 한계를 목격하는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싶었다. 조금은 더 나갈 줄 믿었다. 그런데…결국 80년대는 어렇게 닫히는가, 희망은 90년대로 연장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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