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길로 새는 돈이 너무 많다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89.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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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부문에선 모자란다 아우성 … 투기목적으로 쓰이거나 해외로 빼돌려지기도

한국은행의 통화동향에 의하면 지난 11월중 총통화량은 월말 기준으로 54조5천6백72억원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기간 대비 8조원 가량이 더 늘어난 것이며 10월에 비해서도 2조1천억원이나 많은 돈이 시중에 풀려나간 것이다. 한국은행은 내달에도 2조8천억원의 돈이 더 풀려나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보면 분명히 시중에 돈은 엄청나게 많이 풀렸음을 알 수 있다. 자금사정의 ‘쾌청’ ‘흐림’을 나타내는 지표인 어음부도율과 시중 실세금리도 안정권에 진입해 있다. 부도율은 10월달의 0.04%에서 0.03%로 떨어졌고 통화안정증권 수익률 등 시장금리도 소폭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기업·금융기관 등에서는 돈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대체 엄청나게 풀린 돈은 어디로 간 것일까.

 돈은 많이 풀렸는데 기업등에서 돈, 엄밀히 말해 생산자금이 부족하다면 이 돈은 생산부문 아닌 다른 방향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한국은행 자금부 金元泰부부장은 “시중유동자금 중 상당히 많은 돈이 기회만 있으면 움직이는 대기성 자금들이다. 이 자금은 생산부문으로 흐르지 않고 고소득을 쫓는 투기성 경향을 띠어 자금난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물론 대기업들은 3년 연속의 호황 때 벌어들인 떼돈을 부동산이나 유가증권에 빼돌려 자금난을 자초하고 있지만 돈의 흐름이 비정상적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단자사의 고금리 상품인 CMA(어음관리구좌)는 11월중에만 2천억원이나 늘어났으며 투자신탁사의 수탁고도 3천8백억원이나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실적배당의 고율상품인 은행의 금전신탁도 11월말 현재 20조원이나 되는데 지난달에만도 4천억원 이상의 증가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투자연구소 이구세책임연구원은 단자사 수신이 외형적으론 1백억원이나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꺾기’등 부풀린 가공계수가 저리된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돈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반면 증권사의 고객예탁금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증시침체를 반영, 판돈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11월말 현재 1조3천6백억원으로, 지난달에만 2천5백억원 가량이 감소됐는데 지난 4월 최고 수준이엇던 2조8천억원 규모에 비하면 절반도 안되는 상태이다. 한국은행 저축부 張漢敬과장은 “CMA 등 제2금융권의 고수익 상품과 은행신탁고가 최근 4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모두 다 대기성 자금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따르지만 상당량은 부동자금이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최근엔 盆唐지역으로 유입될 돈이 일시 이곳에 피난처를 정하고 있다는 분석을 하고 있는 금융기관 관계자가 많다. 이 돈이 만약 고스란히 분당으로 몰린다면 항간의 얘기대로 분당을 ‘분탕질’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 강남지역의 꽤 산다는 사람들도 아파트 평형을 넓히려는 의도로 들썩거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건설부는 3조원가량의 돈이 분당지역으로 유입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금이 가장 확실하다”

 전직관료 ㄱ씨는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지난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부동산과 증시에 잠겨있던 30억원의 돈을 빼내 송금했다. 재산 중 일부가 아직 한국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금융실명제다 토지공개념이다 해서 어수선하다보니 궁리하다 못해 이같은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또 한동안 맛을 들였던 증시도 연일 곤두박질을 쳐 몇억을 날려 어지간히 심기가 불편하던 ㄱ씨로선 궁여지책이었다고나 할까. 어차피 자금 굴리기가 안전한 외국에서 노후생활을 보낼까 생각하던 참이어서 안성맞춤으로 여겨졌다. 돈 문제에 관한 한 애국심이란 추상명사인 것이다.

 70년대 서울 명동 사채시장의 큰손이었던 또다른 ㄱ씨도 비슷한 ‘천민 자본가’다. 증시·부동산 시황이 좋지 않아 번번이 손해를 보자 일단 거액을 집에 보관, ‘장롱예금’ 형태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ㄱ씨의 측근은 제2금융권의 고수익 상품에 일시 넣어두었다가 때를 보라고 권유했지만 여러 가지 걸림돌이 많다고 판단한 ㄱ씨는 “현금이 가장 확실하다”며 좀더 관망하겠다는 자세다. 실명제 실시 후의 자금추적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보겠다는 것이다.

 

왜곡된 자금흐름 경제질서 헤쳐

 몇백억대의 큰손들말고도 재산 굴리는 데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부동산이냐, 증시냐, 금융상품이냐, 아니면 아예 호황을 누리고 있는 서비스업종으로 가느냐를 두고 방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서울 강남의 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ㅇ씨는 하는 일 없이 놀고 먹지만 그동안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임야나 증시에 굴려 짭짤하게 축재한 사례. 그런데 어쩐지 요즘은 투자대상이 마땅치 않아 망설이고 있다. 고심끝에 생각해낸 것이 서비스업 진출인데, 대형음식점으로 낙점을 둬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고 들린다.

 최근 증시가 바닥권을 헤매자 이곳에서 이탈된 뭉칫돈들이 고수익 투자처를 찾아 이리저리 넘나들고 있다. 또 정부 차원에서 투기 억제를 위한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등 강도 높은 정책을 발동할 것이 예상되자 뭉칫돈들은 자유롭게 자금이체가 가능하면서도 고수익이 보장되는 금융상품으로 대거 모여들고 있으며 아예 출처를 드러내기 싫은 ‘검은 돈’들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운동양식은 조금이라도 이익이 많이 나는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같은 거액의 부동자금들이 사회 곳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투기를 조장, 돈의 건전한 흐름을 왜곡시키며 경제질서를 해친다는 데 있다. 정작 필요한 생산부문으로 돈이 흐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로의 자금유출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에서도 얼마든지 감지되고 있다고 한다.

 서울 명동에서 ㅊ실업이란 간판을 걸고 신용카드 사설금융업소를 열고 있는 ㅇ씨는 “사채시장을 주름잡았던 대부분의 큰손들은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켰거나 옮길 채비를 하고 있다”면서 그 또한 전주(錢主)를 여러번 바꾸었다고 실토한다. 외환은행의 창구 직원도 올들어 해외송금을 하는 고객이 부쩍 많아졌다고 전한다. 韓銀에 의하면 9월말까지 해외에서 공식통로를 통해 국내로 들어온 돈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32%가 줄어든 7억2천만달러였으나 국내에서 해외로 송금된 돈은 작년보다 10배 이상 늘어난 5억4천만달러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원화절상이란 이점이 사라지면서 외국에서 들어오는 핫머니(투기성 부동자금)들이 빠져나가고 햇빛 아래 드러내기를 겁내는 국내 핫머니들도 대거 국외로 탈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국제수지표상의 오차 및 누락계정이 올들어 적자로 돌아선 것도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하나의 실마리다. 그러나 이 규모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잡힌 통계에 불과하다.

 

투기성 부동자금 해외로 도피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암달러시장에서 달러를 사갖고 나가거나 현금을 갖고 나가 현지에 떨어뜨리고 온다든가, 기업체라면 수출입 가격을 조장하는 등 현실적으로 구멍은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다면서 공식통계의 2~3배는 되지 않겠느냐는 견해다. 최근 재무부는 지난 1일부터 지정 거래은행 한곳에서만 송금하도록 규제, 허점을 다소 보완했고 국세청은 외화도피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서슬푸른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큰손들은 금융권과 부동산에서 아예 멀찍이 떨어져 골동품이나 미술품에 돈을 밀어넣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기 시작했다고 서울 인사동의 한 가게 주인은 귀띔한다. 또 ‘주식형 부동산투자’란 신종사업이 등장, 부동자금의 유입이 예상되고 있다. 세계리조트(주)의 李源茂차장은 불과 3개월만에 8백구좌에 36억원의 실적을 올리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돈의 물꼬가 잘못된 방향으로 터진 상황에서는 돈을 풀어도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11·14’경기대책으로 풀려나갈 많은 돈들이 얼마나 제조업체의 갈증을 해소시킬지 적이 궁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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