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무너지다
  • 박권상 (주필) ()
  • 승인 1989.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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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베를린에 갈 때마다 반드시 분단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大門을 찾았다. 마지막 방문은 지난 5월 상순의 어느날. 그날은 몹시 더웠고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그래서였는지 우중충한 대문의 여섯 개 圓柱와 벽이 더욱 어둡고 침침하게 보였다. 동서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을 잇는 문인데도 어찌된 셈인지 문의 서쪽 광장에서 베를린 장벽은 半圓形으로 굽어 광장 일대가 동독에 속한다. 따라서 서베를린쪽에서는 문에 접근할 수 없다. 그대신 담 밖에 구축한 층층대에 올라 담 안쪽의 브란덴부르크대문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

 古代 아테네의 城砦 아크로폴리스의 출입문을 모방한 것. 여섯줄 둥근 기둥위를 가로지르는 石檀이 있고 그 한가운데 네 마리의 靑銅馬가 戰車를 이끌고 전차에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市中心 동쪽을 향하고 있다. 빅토리아여신의 등에는 하늘 높이 黑赤黃의 獨逸旗가 휘날리고.

  파리의 개선문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정교하지도 않다. 그러나 지난 2백년 동안 독일민족의 榮辱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 아닌가. 나폴레옹軍의 군화소리, 비스마르크의 함성, 바이마르공화국의 흥망, 히틀러의 제3제국, 그리고 붉은 군대의 침입과 독일분단 등 온갖 역사의 굴곡을 목격한 것이다. 처절한 시가전으로 75%의 건물이 파괴되었는데 용케도 살아남은 브란덴부르크대문, 거무티티한 문기둥에 포탄맞은 흔적이 앙상하게 남아있다.

 브란덴부르크대문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콘크리트담벽은 잡다한 낙서와 그림 등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대문 바로 앞 유난히 흰 장벽에 쓰인 “자유냐 공산주의냐?”라는 낙서가 시선을 끌었다. 가슴에 와닿는 절실한 질문이었다. 베를린을, 독일을, 그리고 유럽을 갈라놓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좀 떨어진 담벽에는 페인트로 쓰여진 더욱 강한 구호가 있었다.

 “동과 서에 다같이 자유를 ! ”

 

自由와 사회정의, 一黨독재를 누르다.

 불행한 것은 이 구호를 담 뒤 저쪽 사람들은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허술하게 시멘트벽돌로 아무렇게나 쌓아올린 장벽, 그러나 누구도 감히 무너뜨릴 수 없고, 누구도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비극의 분할 선이었다. 벽 뒤 철조망에 전류가 흐르고 지뢰가 깔려 있고 곳곳에 중무장한 동독병사들이 두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 장벽이 생긴지 28년. 그동안 벽을 넘으려다 71명이 죽었고 그 가운데 55명은 바로 경비병이 쏜 총탄에 맞아 즉사했다는 것이며 다른 1백12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만9천명이 夜陰을 타서 자유를 찾았는데 그중 5백명이 동독 경비병이었다.

 “우리는 저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 독일의 분단, 유럽의 분단이 가져온 것이니까. 동서분단상황이 해소되고 유럽이 통합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市정부대변인의 말이다. 그는 이어 “베를린의 높은 담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화로 가능한 합의를 얻어냄으로써 분단을 극복해야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곧 빌리 브란트의 東方政策이었다. 동서분단의 현실을 인정하고 동서간의 평화공존의 길을 열어 활발한 동서접촉과 교류, 동서화해로써 분단의 고통을 덜고, 동서통합의 테두리 안에서 독일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동서독사람들이 다이알을 돌려 통화하고 편지를 띄우고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고 연간 5백만 이상이 왕래하게 되었다.

 동독은 공산세계에서는 우등생이다. 국민소득 1만달러의 부유한 나라이다. 그러나 2만달러의 서독을 따를 수 없다. 무엇보다 공산주의 1당 독재는 결코 자유와 사회정의를 당해낼 수 없다. 반대로 이설과 대안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자유사회와 시장경제 앞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결국, 공산주의가 지니는 본질적 모순이 폭발하여 소련에 코페르니쿠스적 地殼變動이 일어났고 폴란드에서 공산당 1당독재가 끝나 자유노조 중심의 비공산정권이 들어섰고, 헝가리공산당이 스스로 해체를 선언하고 사회민주주의로 탈바꿈하면서 복수정당제와 시장경제를 도입하였는데, 이어 동독공산당 역시 구체제를 청산하고 개혁의 열기에 밀려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자유여행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향하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저지하는 최후수단으로 아예 동서독국경을 개방하고 말았다. 서방에로의 탈출이 주춤하리라는 계산된 도박이다.

 

民主的 두 독일의 聯合이 구성될 듯

 이렇듯 싱겁게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나는 1963년 젊고 패기만만한 존 케네디가 서베를린시 광장에서 행한 獅子吼를 잊을 수 없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베를린인이라는 한마디입니다. 공산주의야말로 미래의 길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으나, 그사람들을 베를린으로 데려오십시오. 베를린의 벽이야말로 공산주의 실패를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죄악이요 인간성에 대한 죄악입니다. 자유는 불가분입니다. 한사람이 노예로 있는 한 모든 사람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든 자유인이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들의 베를린인입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젊고 용기있는 케네디의 그 신선하고 감동적인 메시지, “나는 베를린人”이라는 말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때 바로 케네디 옆에 서있던 역시 젊고 자신만만한 빌리 브란트, 그가 얼마전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남긴 말이 생각난다.

 “동방정책은 이제 끝이 났다. 그리고 동서관계에, 동서관계에 새 지평이 열리고 잇다. 이데올로기를 떠난 하나의 유럽이라는 방향으로. 그리고 동독에도 자유와 민주주의 개혁이 온다. 그것이 곧바로 독일의 통일로 가는 길은 아니다. 아마도 두 개의 민주주의적인 독일이 느슨하게 연합하는 형태가 가시권에 들어온다. 동독이 소련과 서독이 서방측과 각각 안보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대정치가의 신중론이다.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경계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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