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칼럼] 右傾의계절
  • 한승주 ()
  • 승인 1989.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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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는 左傾과 右傾의 양단을 오락가락하는 악순환에서 언제나 벗어날 것인가. 공장도 학교도 신문도 방송도 모두 좌익세력이 장악할 것 같다던 때가 엊그제인데 지금은 또 나라 전체가 너무 우경하는 것을 걱정하게 되었다.

 지금 우익을 대변하는 간행물과 그 세력을 집결하는 단체들이 우후죽순같이 생겨나고 언론과 일반대중은 소위 공안정국에 대하여 그것이 당연한 것인 양 비판도 항의도 별로 안하는 실정이다. 물론 이러한 우익의 공세는 민주화와 더불어 반체제세력이 너무나 과격한 운동을 전개한 것에 대한 반응과 반발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동의대 燒死사건, 연세대 폭행치사사건 등은 학생운동의 당위성을 실추시켰고 문익환목사, 임수경양등의 입북사건은 안기부 등 공안당국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이 주축이 된 좌익운동이 이념에 있어서 과격하고 행동에 있어서 난폭하게 되었던 근본적인 원인 자체가 과거의 정권들이 너무 반공적이고 탄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흔히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살아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거니와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진보적 사고와 운동이 용공 또는 좌경으로 몰려 온건한 좌익운동이 설 땅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렇듯 작용과 반작용이 거듭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右가 極左를 키워주고 左는 極右에게 탄압의 명분을 주는 양극화의 길을 걸어왔다. 다른 나라들에선 ‘역사의 종식’ ‘이념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는 여전히 우물안에서 ‘파쇼 타도’와 ‘좌경 섬멸’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또 누구를 탓할 것인가? 분단된 국토에서 북한공산집단의 적화통일 위협이 좌익탄압의 명분과 필요를 만들어냈고 전쟁과 가난이라는 극한상황이 관용과 타협의 가능성은 박탈해갔다. 그러나 70년대를 거쳐 80년대가 다 지난 오늘 경제성장으로 나눠먹을 것도 생겼고 북한의 위협을 막아낼 능력도 생겼는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까지도 극한적인 대립과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인가?

 

左도 右 ‘반쯤의 해결책’ 용납치 않아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제는 左나 右가 ‘반쯤의 해결책’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右는 강한 위치에 있을 때 左를 철저히 봉쇄하고 탄압하는 것이 상책인 것으로 생각하고 左는 右가 조금이라도 허를 보일 때 절벽끝으로 밀어버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右가 쓰는 ‘좌익척결’이란 말이나 左가 쓰는 ‘우익박살'이라는 표현이 다 이러한 극단적 사고와 투쟁의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과잉은 역작용을 가져오고 역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 5공화국의 과욕은 민주화를 가능케 했고 야당후보자들의 과욕은 盧泰愚후보를 당선시켰다. 학생들의 과격운동은 공안정국을 합리화시켰고 동의대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사형구형은 그들이 선고를 거부하는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임수경양의 방북은 우익의 궐기를 자극했고 그녀에 대한 당국의 비관용적인 태도는 반체제세력의 결속을 돕고 있다.

 물론 右도 左도 ‘반의 해결’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한 해결을 추구하는 데는 각자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집권층은 반체제세력이 약해질 때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믿는다. 반체제세력은 집권세력을 불신하여 그 타도만이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우익이니 좌익이니 히는 표현을 쓰기는 하나 우리나라에서 그 말들은 그들이 상징하는 세력들의 철학적, 이념적 속성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우익은 집권층과 체제옹호세력을 지칭한다면 오늘의 좌익세력은 유신과 5공시대에 걸쳐 민주운동에 편승해서 그 주도세력으로 활약, 성장했고, 6 · 29 이후 그 여세를 몰아 기존집권세력의 제거를 기도해왔다. 그러나 극좌세력은 개혁과 개량을 배격하고 노동운동을 정치이념화시키는 등 완전승리를 추구한 결과 중산층을 포함한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잃고 점차 고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반체제세력의 고립과 쇠퇴는 집권층과 체제옹호세력의 사기와 기세를 올려주었으며 그들은 이 기회에 좌익과 반체제세력을 발본색원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모든 사회운동을 정치화, 이념화시킴으로 해서 우익측의 반동의 구실만 제공해주고 말았다.

 

집권세력이 먼저 개혁조치 취해야

 아직 해결의 실마리가 묘연한 全敎祖문제도 이러한 탄압과 폭발의 악순환의 일환이다. 건국 후 40여년 동안 자기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진정한 대변단체가 없이 지내온 교원들이 민주화 시기에 와서 자율적 이익대변기구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욕구이다. 그러나 그 지도부는 순수한 노조활동보다는 그것을 ‘참교육'과 이념운동에 결부시켰고 이것은 당국으로 하여금 반체제 혁명운동이라고 하여 탄압할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성공적인 노조는 예외없이 그러한 정치적 · 이념적 유혹을 뿌리치고 구성원의 권익증진에 전념한 것들이었다. 노조가 그 본연의 목표에 전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체제와 법제도가 그것을 허용하고 가능케 해야 한다. 법과 제도가 순수한 노조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 그 운동은 과격파들에게 장악되고 따라서 이념화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좌와 우가 ‘끝장을 보는 승리’보다 ‘반쯤의 만족’을 추구함으로써 극한 투쟁적인 악순환을 깨고 공존공생하는 방법은 없는가? 이러한 일에 이니셔티브를 취해야 하는 쪽은 물론 강자인 집권세력이다. 서구에서는 기득층이 ‘啓明된 자기이익‘ (enlightened self-interest)을 위하여 진보적 개혁에 동의하고 복지사회의 길을 열었다. 그들 나라에서 이념투쟁의 종식이 요행히 찾아온 것은 아니다.

 집권세력과 기득층이 양보를 하고 개혁을 단행할 시기는 그들이 궁지에 몰릴 때가 아니고 공세와 우위의 입장에 있을 때이다. 전교조가 정부의 강경책으로 기선이 꺾였다고 해서, 좌익운동이 그 과격성으로 지지기반을 잃었다고 해서 강권으로 그들의 완전제거를 꾀할 것이 아니라 이때를 好機로 삼아 선제적 개혁조치를 취하는 지혜와 아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右傾의 季節은 강자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이념세력간의 투쟁을 격화시킬 수도 완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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