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역전 노리는 태극전사들
  • 김세훈 (경향신문 기자) ()
  • 승인 2006.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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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계기로 유럽 진출 기대…안정환·설기현 등은 ‘빅리그’ 진출 꿈꿔
 
‘인생역전’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었다. 여섯 숫자만 잘 찍으면 뭉칫돈을 챙길 수 있는 로또가 발매되면서 나온 인기어다. 물론 당첨 가능성은 무척 낮지만 단번에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치명적인 유혹 탓에 로또는 인기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월드컵은 축구 선수들에게 인생역전의 장이다. 월드컵에서 뭔가를 보여준다면 더 많은 돈(연봉)을 주는 더 좋은 직장(클럽)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해외 진출로 가는 지름길이 바로 월드컵. 선수들이 한결같이 월드컵에 목을 매는 이유다. 독일 월드컵을 앞둔 태극전사들도 마찬가지다.

우선 안정환(30·뒤스부르크). 올해 6월을 끝으로 뒤스부르크를 떠날 예정인 안정환은 벌써부터 스코틀랜드·잉글랜드·독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온다. 에이전트에 따르면 하츠(스코틀랜드), 셰필드 유나이티드·리즈 유나이티드·선덜랜드(이상 잉글랜드) 등이 안정환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뒤스부르크가 원하는 안정환의 이적료는 75만 유로(약 9억원). 이미 몇몇 구단은 돈까지 마련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니 안정환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월드컵에서 잘만 하면 ‘특급 대우’를 해주겠다는 구단이 더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프랑스·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해보았던 안정환이 경험하고 싶은 리그는 스페인 또는 잉글랜드. 나이 등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만큼 활약을 펼친다면 가능성은 높아진다.

‘스나이퍼’ 설기현(27·울버햄프턴)도 월드컵을 통해 빅리그 진출을 노리고 있다. 벨기에에서 해외 생활을 시작한 설기현은 벌써 유럽 7년차인 베테랑이지만 ‘유럽 축구의 변방’만 돌았다. 울버햄프턴과 계약한 기간은 아직 2년이 남았다. 하지만 울버햄프턴이 이번에 또다시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하지 못하면서 돈이 말랐다는 것이 변수가 되고 있다. 재정난 타개를 위해서는 선수를 팔 수밖에 없다. 최근 ‘설기현을 이적 시장에 내놓겠다’는 구단의 방침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방출 소식이지만 설기현에게는 학수고대하던 희소식이다.

박주영, 매너리즘 탈출 ‘명약’은 해외 진출

설기현은 2년 전 프리미어리그 사우스햄턴 등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지만 울버햄프턴이 발목을 잡아 가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구단이 ‘제발 나가라’며 등을 떠밀고 있으니 설기현이 월드컵에서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면 오매불망 꿈꿔온 빅리그 진출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주전에서 밀려났지만 월드컵을 통해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투르크 전사’ 이을용(31·트라브존 스포르)도 빅리거를 꿈꾼다. 이을용은 이번 시즌 터키 리그에서 당당한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에게 유럽축구연맹(UEFA)컵 진출권을 안겼다. 대부분의 경기에서 풀타임으로 뛰었다는 점은 이미 그의 기량이 공증을 받았다는 증거. 이을용의 경우에는 트라브존 스포르 잔류나 터키 명문 구단으로의 이적은 기본. 하지만 이을용이 원하는 것은 잉글랜드 진출이다. 유럽에서 구인난을 겪는 포지션이 왼발을 잘 쓰는 왼쪽 수비수인 만큼 중앙 미드필더와 왼쪽 수비수까지 넉넉히 소화해내는 이을용의 매력은 한층 돋보일 수 있다.
우리 대표팀의 ‘젊은 피’들에게도 유럽 진출은 최고의 꿈이다. 유럽파가 될 가능성이 높은 젊은 선수는 역시 ‘축구 천재’ 박주영(21·서울). 박주영은 2005년 박지성(25·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함께 한국 축구판을 뒤흔든 키워드였다. 아시아·세계청소년대회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고 국가대표로 결정적인 골을 성공시켜 한국의 독일 월드컵 본선행을 이끌었다. 프로 축구에서도 시즌 득점왕에 오르며 MVP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다. 어린 나이에 우리 나라에서 이룰 것은 다 이룬 그가 매너리즘에 빠진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외 진출이다. 서울구단은 지난해 3월 박주영과 입단 계약을 하면서 박주영이 해외 진출을 원할 경우 이적료 액수와 상관없이 해외 진출을 허락하기로 배려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했다가 실패하고 지난해 중반 국내로 복귀한 이천수(25·울산)도 독일 월드컵을 통해 해외 진출에 재도전한다. 정신적으로 훨씬 성숙한 선수로 거듭난 데다 절정에 이른 기량을 뽐내고 있는 만큼 월드컵에서 한두 골만 넣으면 유럽에서 실패한 ‘구한(歐恨)’을 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 신화’를 이룩했을 때 박지성·이영표는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고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했다. 이을용은 터키 리그에 진출하면서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 최초의 유럽파가 되었다. 송종국·김남일은 각각 네덜란드 페예노르트와 엑셀시오르에서 ‘해외물’을 맛보았다. 이천수는 이들보다는 다소 늦었지만 역사에 남을 한국선수 최초 프리메라리거 자격으로 스페인 레알소시에다드 유니폼을 입었다.

이번 독일 월드컵에서는 또 어떤 태극전사가 유럽 진출 꿈을 이룰까. 누가 유럽파로 거듭날지는 예측하기 섣부르지만 축구 선수로서 인생을 건 이들의 운명이 월드컵 활약상에 따라 갈릴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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