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계절 앞에서
  • 고종석 (소설가) ()
  • 승인 2006.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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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글 잘 쓰는 어느 기자 말대로 ‘애국의 계절’이 돌아왔다. 애국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것은 열정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민국가 시대의 최고 열정은 ‘나라 사랑’의 열정일 테니 말이다. 이 애국의 열정은 또 이 시대에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열정은 숭고한 열정이면서 비천한 열정이다. 아무러면 어떠랴? 신문·잡지 지면과 브라운관은 이 열정으로 출렁이고 있고, 이 열정의 브로커를 자임한 이동통신 업체들은 제 신바람의 불길을 대한민국 전체로 번지게 할 풀무질에 여념이 없다. 아니, 대한민국을 태워버릴 듯한 이 열정의 책임을 매스미디어와 이동통신 회사들의 장삿속에 돌릴 일은 아니겠다. 한 언론학자가 적절히 표현했듯, 국민들 스스로가 ‘월드컵을 기회로 더욱 세차게 뒤집어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애국주의는 미디어와 자본가들이 창조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안에 이미 있었다. 미디어와 자본가들은 그것을 고무 찬양하며 팔아먹고 있을 뿐이다.


이 월드컵 애국주의는 썩 나쁘지 않다. 우리 살 깊숙이 새겨진 국민국가 체제가 어차피 애국주의의 열정을 이글거리게 하고 있다면, 그 열정의 마그마를 분출할 분화구로는 총싸움보다 공놀이가 한결 낫다. 물론, 네 해 전 월드컵 때 중국 네티즌들이 ‘시범적으로’ 보여주었듯 이번 월드컵 때도 증오의 언어들이 인터넷에서 춤출지 모른다. 경쟁 국가 팀 응원 군중 사이의 충돌로 관중석이 난장판이 될 수도 있다. 너무 잘하거나 너무 못한 선수 하나가 흥분한 관중에게 살해될 수도 있다. 텔레비전으로 제 나라 팀을 응원하던 누군가가 너무 기쁘거나 슬퍼서 심장마비를 겪을 수도 있고, 홧김에 자살하거나 이웃을 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 불상사는 전면적으로 발산된 애국주의의 값으로는 결코 비싸지 않다. 폭탄과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우리가 애국주의의 값으로 치러야 할 그 헤아릴 수 없는 주검들에 견주면 말이다.

또 다른 열정의 분출구, 선거

이런 공놀이의 우아함 못지않은 것이 선거의 우아함이다. 비록 월드컵을 앞둔 탓에 이번 지방선거에 쏟아진 열정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게다가 야당 대표가 겪은 흉악망측한 일로 분위기가 몹시 뒤숭숭해지긴 했지만, 선거는 공놀이와 마찬가지로 열정의 분출구로서 비교적 안전하다. 당파심이나 호승심(好勝心)이 정치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내재한 유전자 같은 것이라면, 그런 열정을 예전처럼 칼싸움이나 총싸움으로 터뜨리는 것보다는 선거로 터뜨리는 것이 한결 낫다. 언론은 입버릇처럼 ‘선거 과열’ 운운하지만, 선거에 쏟아지는 열정을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그 ‘과열 선거’에 고압으로 내장된 사랑과 증오의 합선은 이 민주주의의 발명품을 피 흘림 없는 카타르시스 공간으로 만든다. 가장 과열된 선거도 가장 차분한 총싸움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낫다.

그러나 월드컵과 지방선거에 대해 한국인들이 분배한 열정의 차이에서도 보이듯, 열정이라는 재화는 무한하지도 무차별적이지도 않다. 한쪽의 넘치는 열정은 다른 쪽의 빈곤한 열정을 초래한다. 또 열정은 그 분출자가 대상에게 느끼는 심리적 거리에 반비례한다. 월드컵 축구에 대한 열정이 유난히 큰 것은 한반도 남쪽의 주민 개개인이 한국 축구팀을 대한민국 국가와 일치시켰고 자신을 대한민국 국가와 일치시켰다는 뜻일 터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한 이동통신 회사 광고 카피는 바로 그 예민한 신경섬유를 움켜쥔 지혜의 언어다.

대추리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서, 정치인들의 부패나 성추행에 대해서, 결식 아동이나 매맞는 여성이나 축구공 꿰매는 소녀에 대해서, 관타나모나 라말라에 대해서 사랑과 증오의 열정이 그만큼 솟지 않는 것은 한국인 다수가 이들 사안에 자신을 일치시키지 못했다는 뜻일 터이다. 어쩌면 이것은 문화적·교육적 차원을 넘어서 인류의 진화 단계에, 다시 말해 생물적 차원에 얽매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대추리고 결식아동이고 까맣게 잊은 채 텔레비전 앞에서 맥주로 목을 적시며 ‘세차게 뒤집어질’ 내 모습이 벌써 아른거린다.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인간의 기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자동 인형의 꼬락서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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