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짜리 소설 써보려 한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6.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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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국제적 작가 바오닌과 소설가 방현석의 ‘유쾌한 만남’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술판은 이미 무르익어 있었다. 덩치가 큰 소설가 방현석씨(45)가 작고 가무잡잡한 사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콧수염을 기른, 장난스러운 표정의 남자가 뭐라고 중얼거리자 모두 배꼽을 쥐었다. 웃음소리가 가라앉은 뒤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콧수염 사내가 바오닌(54)이었다. 베트남 작가 중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다. 그 옆에 시인 쩐 꽝 다오와 소설가 팜 응옥 띠엔 등이 앉아 있었다. “베트남 문단의 술꾼이자 진짜 예술가들”이라고 방씨가 소개했다.

기자는 직전까지 베트남 작가동맹 휴틴 서기장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 중이었다. 원로 시인이자 노련한 행정가인 휴틴의 기름진 언변을 듣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바오닌과 함께 있다. 빨리 와라.” 방현석씨였다. 베트남에 도착하던 날, 그에게 바오닌을 만나고 싶다고 말해두었다. 바오닌은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작가였다. 베트남 문단에서 이른바 ‘비체제’에 속하는 그는 작가동맹 사람들과 친하지 않았다. 또한 매일 술에 절어 있어서 그와 대화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회장 고영직)은 5월26~30일 하노이를 방문했다. 사진작가 최경자씨가 한국인 최초로 하노이에서 <베트남 풍경-얼굴>전을 열었다. 27일에는 소설가 방현석씨가 하노이 대학 한국학과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했다. 29일에는 한국 문인들과 베트남작가동맹·베트남사진가동맹 회원들이 모여 양국의 문화 교류를 위한 세미나를 열었다. 바오닌과의 만남은 이런 공식 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급작스럽게 성사되었다. 

 
바오닌은 196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북베트남인민군에 입대했다. 그는 ‘영광의 제27청년여단’에 입대한 소년병 5백 명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열명 중 한 명으로, 이른바 ‘혁명 전사’다. 하지만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소설 <전쟁의 슬픔>(1991년 발표)은 흔히 상상하는 사회주의 계몽 소설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전쟁의 슬픔>에서 바오닌은 자신이 참가한 민족해방전쟁의 당위성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각제를 복용하는 동료들이나 이성을 잃고 자살하는 지휘관의 모습 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주검을 함부로 취급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주인공 끼엔의 내면은 전쟁에 대한 환멸감으로 가득 차 있다.

바오닌은 <전쟁의 슬픔>을 발표한 직후 인민군의 숭고한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군과 당 내부에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소설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베트남전을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본 최초의 베트남 소설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의 소설은 김남일·최인석·방현석 등 한국의 작가들에게도 큰 인상을 남겼다. 이들이 11년 전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지금껏 이들은 바오닌을 비롯한 베트남 작가들과 친구로 지내고 있다.

방현석씨는 그동안 셀 수 없이 베트남을 드나들었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베트남인들의 아픔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린 중편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이나 그에게 황순원문학상을 안긴 <존재의 형식> 등은 그의 열성적인 ‘베트남 공부’가 낳은 산물이었다. 그는 수개월 전에도 하노이를 방문했다. 문예 계간지 <아시아>의 창간을 준비하면서다. “비어 있던 내 상상력의 한 부분을 채워준 친구들과 책이 만들어지기 전에 미리 상의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그는 <아시아> 창간호를 쥐고 하노이를 다시 찾았다.

“<아시아>는 반전 문인들의 매체여야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바로 옆에 있는 라오스를 형제 나라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라오스를 모른다. 독일과 프랑스 소설은 봤지만, 라오스 소설은 한 편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점에서 <아시아>가 아시아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역할만 해도 대단하다고 본다.”

바오닌이 건배를 권하며 말했다. 그는 <아시아> 창간호에 소설 <물결의 비밀>을 기고했다. 전쟁의 비극적인 에피소드를 세 쪽 분량으로 짧게 쓴 장편(掌篇)이다. “짧게 써야 신문에서 소개할 것 아닌가. 앞으로 한 글자짜리 소설도 한번 써볼까?” 소설이 너무 짧다고 했더니 그가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문학을 제대로 번역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고유 정서까지 어떻게 옮길 수 있겠나. 교류를 위해서 번역은 불가피하지만, 각자 언어가 지닌 고유성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방현석씨가 바오닌의 말을 듣고 화답했다. “한국의 현재 모습이 아시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미래의 가능한 모델일 수는 있겠지만, 그게 바람직한 미래일까. 지금부터라도 아시아 각국이 각자 문화적 주체성을 잃지 않은 채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날 하노이 대학 특강에서도 그가 강조한 말이다.

바오닌이 다시 말을 받았다. “<아시아>는 무엇보다 전쟁에 반대하는 문인들의 매체가 되어야 한다. 전쟁보다 잔인하고 불행한 사태는 없다. 그저 여자들과 하는 사랑 전쟁만 있으면 되는 거다.” 한동안 진지하던 그가 기자를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일순 처음의 장난스럽던 표정이 되살아났다. “그런데 안기자, 소설가들이 한 말을 너무 믿지 마.” 그는 베트남 작가들 가운데 가장 유머러스하면서도, 냉소적인 독설가였다.

우리 일행은 ‘2차’를 위해 하노이 뒷골목의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드득, 천막 지붕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노이 맥주’ 빈 병이 탁자 빈자리를 가득 채웠다. 술자리는 새벽 1시에 끝났다. 바오닌이 휘적휘적 걷더니 자신의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돈 워리(걱정 마).” 깜짝 놀라는 일행에게 손사래를 친 뒤, 그가 시동을 걸었다.   위한 세미나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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