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김수근 다시 보기
  • 전진삼(건축 비평가) ()
  • 승인 2006.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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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르코 미술관에서 타계 20주기 초대전…생전에 한국 현대 건축의 ‘대부’로 활약

 
서울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구 문예진흥원  미술관). 경사로진 길을 따라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오르고 있다. 평소에 관람객은 이 길을 따라 오르지 않는다. 오랫동안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이 이번 전시를 위해서 열렸다. 이 건물의 설계자인 건축가 김수근의 타계 20주기를 맞아 부르는 진혼곡이 그곳으로부터 들려온다. 전시명 <지금 여기, 김수근>. 아르코 미술관의 스페셜포커스 초대전으로 6월7일부터 7월28일까지 전관에서 벌어진다.

단순한 건축 전시가 아니다. 그곳에선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여러 장르의 예술이 어울려 펼쳐진다. 생전의 김수근 선생이 공간사랑 소극장을 통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무용·연극·퍼포먼스·시문학·무속예술·비디오 아트·사진과 인간 네트워크가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는 셈이다.

김수근은 흔히 한국 현대건축의 태두로 불린다. 그는 프랑스 대사관의 설계자 김중업 선생과 함께 1960년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 건축을 대표했던 건축가이다.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사옥, 경동교회, 한계령휴게소, 국립진주박물관,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등 그가 남긴 건축물은 한국 현대건축사를 장식하는 주옥같은 작품으로 통한다. 또한 그의 건축 제자들은 오늘날 이 땅의 지도급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김원, 유걸, 유춘수, 민현식, 박길룡, 이범재, 승효상, 이종호 등이 설계 현장과 대학 강단에서 선생의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김수근의 건축 사상은 네거티비즘의 공간 미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건물을 지을 때 동시에 여백을 바라보는 태도를 일컬음이다. 우리 옛 건축이 비움을 위하여 채워나갔다는 조형의지를 현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 그의 건축 원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수근의 건축이 복고 지향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전통이란 현대의 감각으로 창조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그의 건축 사상을 지배한다. 공간사옥으로 대표되는 그의 건축은 종종 미로의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동서양 공히 중요한 건축의 전통이지만 김수근에게 미로 공간은 우리 옛집의 배치 형식을 닮았다. 그는 우리 건축 공간의 고유미를 현대에 되살리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

문화예술계 최고봉들, 김수근과 깊은 인연

김수근의 건축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목받는 이유는 시원시원한 조형성과 자갈자갈한 디테일의 휴먼 스케일에서 인본주의 성향이 듬뿍 묻어나기 때문이다. 도시 가로에서 단위 건물이 지녀야 할 조형적 특이성과 미적 완성도는 그의 건축이 지니는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수근의 진짜 매력은 그가 남긴 건물 이상으로 그를 추억하는 많은 지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한국 문화예술의 최고봉을 달리는 수많은 아티스트와 문화 행정가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와 크고 작은 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쉽게 확인 가능하다.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 옹, 목수 신영훈 선생, 미술평론가 오광수씨, 문화재청장 유홍준씨, 무용가 남정호씨, 문화기획가 강준혁씨, 사물놀이패 김덕수씨, 시인 조정권씨 등이 그들이다.

김수근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단연 월간지 <공간>을 발간한 일이다. 오는 11월호로 창간 40주년을 맞는 이 잡지는 창간 후 30년 가까이 종합예술지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건축 전문지로서 재정의 하며 국내외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의 초가와 민가를 밀착 취재했고, 기왓장 등에서 한국의 문양을 채취해 일찌감치 우리 문화의 원형 찾기에 솔선수범했으며, 공연예술과 미술의 최첨단 형식및 사조를 국내에 전달하는 창구가 되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으며 ‘병신춤’의 공옥진을 발굴하여 그녀의 기예를 세상에 알렸고 강석희 등 현대 음악가들과 조우하여 감각의 소통을 꾀하는 등 공간지의 활동영역은 지대했다.

한국 건축의 발전 동력 끊임없이 제공

그뿐 아니다. 철학자 소흥렬, 도시계획 및 건축평론가 조영무 등과 만남을 통하여 공간의 건축사상 및 철학이 한국학파의 근간을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의식을 분명히 했다. 70년대 초에 이미 미래학 세미나를 시작했고, 이때 이어령, 노재봉, 최정호 등 신진학자들과 폭넓게 교감하기도 했다.

김수근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신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 선생 최 선생은 일본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김수근이 부여박물관 왜색시비에 휩싸인 채 내적 분열과 혼돈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의 외래적 건축사상을 온전하게 우리의 것으로 뒤바꿔놓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면에서 최순우 선생은 확실히 김수근의 커다란 병풍이었다. 

 
김수근을 말할 때 누가 뭐라 해도 그의 정치적 풍운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국내 건축 무대 데뷔 시점이 박정희 군사정권 하였고, 이때 만난 김종필과의 인연으로 그는 삼사십 대에 건축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1970년대 말 ‘이란 혁명’ 때문에 테헤란의 대규모 주거단지 프로젝트 계획이 중단되었지만, 호기롭게 외국의 설계 프로젝트 개발에 눈을 떼지 않았던 그의 족적을 좇다 보면 어려운 때일수록 더 많은 일을 벌려야 한다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기회 포착적이며, 도전적이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처럼 바쁘게 살았던 김수근은 55세 되던 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김수근을 일컬어 한국의 문예 부흥을 이끄는 화제의 인물로 주목한  바 있다. 모태 공간, 궁극 공간, 해프닝의 공간, 멋의 공간, 삼간(인간·공간·시간)의 조화 등 숱한 조어를 만들어냈던 김수근은 한국 건축의 문화 원형에 끊임없는 발견과 발전 동력을 제공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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