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대 중도, 큰 승부 벌인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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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엔 독특한 선거 징크스가 있다. 큰 선거를 치른 뒤에는 꼭 이념 논쟁을 겪는다. 대체로 선거에 승리한 이후에는 ‘보수장세’가 열려 보수 회귀 현상을 보이고, 선거에 패배한 뒤에는 ‘개혁장세’가 열려 소장파의 목소리가 커지곤 했다. 이 징크스는 이번 선거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한나라당의 유례없는 압승으로 끝난 5·31 지방선거 이후 김용갑 정형근 이방호 의원 등 한나라당의 ‘보수 스리톱’ 공세가 시작되고 있다.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이방호 의원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에 대해 “6·25 전쟁과 서해교전에서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도 않은 채 유화적 대북관과 국가 정체성이 결여된 역사 인식만을 드러냈다”라고 비판했다.

개혁을 주장하는 당내 목소리에 태클을 걸곤 하던 김용갑 의원 역시 언성을 높였다. 김의원은 지난 6월5일, 홈페이지를 통해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추진하고 있는 남북합작 모내기 협력사업을 겨냥했다. “안보와 미래를 걱정하는 국민의 처지에서 ‘짜증 나는 통일 장사’다. 손 지사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한나라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라는 내용이다. 

선거 승리로 보수 대공세 시작

‘보수 스리톱’의 산발적인 공세가 시작된 가운데 한나라당 보수 진영의 ‘신형 엔진’으로 떠 오른 전여옥 의원이 보수 담론을 집결한 세미나를 열어 관심을 모았다. 지난 6월5일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잃어버린 10년, 한나라당 꿈은 이루어지는가?’라는 제목의 세미나였다.

전의원이 세미나를 연 의도는 한나라당이 고질적인 문전 처리 미숙으로 다 잡은 경기를 놓쳐버린 지난 두 번의 대선을 반면교사로 삼아 내년 대선에서는 반드시 필승 전략을 구사하자는 것이었다. 이날 나온 결론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나라당이 ‘지능적인 축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확실한 팀 컬러를 보여줄 수 있는 ‘선명한 축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미나에 참석한 발제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패한 것이 이회창 후보가 선명하지 못한 보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 후보가 미선이 효순이 추모 촛불집회에 참석한 것을 그 예로 들었다. 참석자들은 내년 대선에서는 선명한 보수 노선을 걸어 ‘보수 집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데 대부분 의견을 같이했다.

발제자로 나선 강경근 교수(숭실대 법학과)는 “6월 말로 예정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해서 한나라당이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송대성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한나라당 내에도 만경대 정신 숭모 세력이 있다. 이들이 당을 떠나게 해야 한다”라고 한발 더 나아갔다. 권혁철 자유경제원 법경제실장은 한나라당이 ‘성장과 친(親)기업주의, 친시장적 접근’을 추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날 세미나에 깜짝 참석한 홍준표 의원도 전 여옥 의원의 ‘보수 축구’를 거들었다. 홍의원은 “10대, 20대의 반미는 이전 세대의 반미와 다르다. 그 근간이 민족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보수적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후 홍의원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내 소장파들 중에는 열린우리당 주장에 동조하는 게 개혁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다”라고 일갈했다.

'토탈 사커'  펼치는 중도 개혁 성향 의원들

이처럼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당내 보수 진영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에 중도 개혁 진영의 움직임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차이가 있다면 ‘보수 축구’가 몇몇 스타 플레이어에 의지하는 것에 반해 ‘중도개혁 축구’는 토털 사커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6월8일, 실체를 공개한 ‘중도개혁 축구’는 소장파 모임인 수요모임, 비주류 모임인 발전연, 중도 성향의 푸른모임, 초선모임인 초지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모임 소속 의원 30여 명은 국회 귀빈식당에서 연석회의를 갖고 ‘당의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의원모임’의 이름으로 7월 전당대회 원칙을 발표했다. ▲합리적 수권 대안 정당 지향 ▲미래 지향적, 개혁적 지도부 선출 ▲대선 후보 간 대리전 지양 및 대선 후보들의 중립 표방 촉구 ▲당내 지역주의 타파 ▲노선, 정책 경쟁 지향 등 5개 항이 이들이 밝힌 원칙이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중도 개혁적인 새 지도부를 구성해서 수권 정당의 면모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푸른모임의 박재완 의원은 “내년 대선과 관련해 한나라당이 ‘반(反)한나라당 연합’ ‘영남 포위 전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전당대회는 한나라당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선거 전략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유권자의 의식을 대변하는 ‘중도 개혁’ 이미지를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의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의원모임’은 오는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독자 후보를 낼 예정이어서 전당대회 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친박근혜 후보와 친이명박 후보가 각축하는 가운데 이들이 내세우는 제3의 후보가 얼마나 세를 이룰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초 대표 후보를 ‘외부 용병’으로 쓰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당헌, 당규’라는 현실적 장벽 때문에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 모임' 7월 전당대회에서 독자 후보 낼 예정

이들이 펼칠 ‘중도 개혁 축구’는 일단은 강한 압박 축구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의 진용에 대해 간사단체 격인 수요모임의 한 의원은 “수요모임이 뒤로 빠져서 수비를 맡고 발전연과 초지일관, 푸른모임이 공격을 맡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최전방 공격수, 즉 당 대표 후보에 대해서는 모임 내에서조차 의견이 분분해 당분간 진통이 예상된다.  

당 대표 후보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지만 노선은 중도 개혁으로 가야 한다는 데 대체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중도 개혁 축구’는 초지일관 중초회 등 초선모임 워크숍을 통해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따로 모임을 가졌던 것처럼 이번 전당대회 전에도 초선 의원들이 따로 모임을 갖고 입장을 조율할 예정이다.

이념 논쟁을 필두로 시작된 당권 경쟁에서 보수를 대변하는 주자로는 정형근 전여옥 의원 등이 나설 것으로 보인다. 정의원이 보수 이미지를 탈색하는 데 집중해온 반면, 한나라당 ‘보수 축구’의 원톱 공격수로 떠오른 전여옥 의원은 지지자들과 독서모임을 통해 보수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더 라이트니네이션>(존 미클레스웨이트, 아드리안 울드리지 지음)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조지 레이코프 지음) 등의 책이 독서모임의 교재인데, 이 책들의 내용은 주로 ‘미국 선거에서 왜 보수주의가 판판이 이기는가’에 대한 것이다.

전의원측의 주장은 ‘중도라는 것은 이념적 실체가 없으며,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고건 전 총리가 이미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얻을 것이 없다’이다. 선명한 보수로 차별화하고 이슈를 선점하는 것만이 한나라당이 내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 그룹에서는 한나라당의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서 여전히 다른 해법을 내놓는다. 지난 대선을 지휘하고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윤여준 전 의원은 “한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나라당 지도부가 오판하고 있다. 국민이 원하는 보수와 한나라당이 지향하는 보수는 거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소장파의 대표격인 원희룡 최고위원은 “다시 보수로 회귀하면 한나라당의 미래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7월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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