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는 ‘축구의 샘’
  • 변현명 (자유기고가) ()
  • 승인 2006.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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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유명 클럽의 선수 공급처 노릇…카메룬·나이지리아는 올림픽 ‘우승’
 
아프리카 축구가 맥을 못 추고 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 출전한 다섯 국가 중 첫 경기에서 한 팀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990년대 이후 세계 축구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아프리카 축구의 부진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우승 때 감독을 맡았던 베켄바우어 독일월드컵 위원장이 우승도 가능한 전력이라고 칭찬한 코트디부아르는 아르헨티나에 2-1로 패했다.  앙골라는 포르투갈에, 토고는 한국에 패했고 가나는 이탈리아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나마 튀니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2-2로 비기면서 아프리카 축구를 전패의 망신에서는 건져냈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부진한 것은 실력이 떨어지는 이유도 있지만 경험 부족이 가장 크다. 공교롭게 튀니지를 제외한 네 나라는 월드컵 무대가 처음이다. 월드 클래스라는  코트디부아르와 가나는 앙골라, 토고보다는 수준이 한 차원 높지만, 이들에게 첫 출전은 아무래도 부담이다. 세계 축구의 영웅 펠레는 “아프리카 국가가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 있다”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펠레의 저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프리카 축구가 몰락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감이 있다. 흑인들은 백인과 황인종이 갖지 못한 유연성이 있다.  체격과 체력도 우월하다. 그래서 이 세계 축구계의 ‘잠자고 있는 거인’이 언젠가는 월드컵 우승컵을 거머쥐리라는 시각이 많다. 미지의 땅으로 여겨지는 아프리카. 비록 이번 독일월드컵에서 검은 돌풍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세계 축구를 호령할 날을 꿈꾸는 아프리카 축구의 시작과 아프리카가 배출한 스타들을 살펴봤다.

카메룬·세네갈, 월드컵 8강 올라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개막전. 직전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에는 마라도나가 건재했고 카메룬을 상대로 대승이 예상됐다. 그러나 결과는 카메룬이 1-0으로 승리했다. 카메룬은 1982년 스페인월드컵에 출전해 페루, 폴란드와 각각 0-0으로 비긴 뒤 이탈리아와 1-1로 무승부를 기록해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지만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카메룬은 8년 뒤인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이변을 연출하며 세계 축구에 아프리카 돌풍을 예고했다. 카메룬은 16강에 올라 콜롬비아를 2-1로 꺾고 8강에 올랐다. 당시 38세의 로저 밀러는 두 골을 터뜨린 뒤 왼손을 배에 올리고 허리를 돌리는 아프리카인 특유의 ‘밀러 세리머니’를 펼쳐 화제가 되었다. 카메룬은 8강에서 잉글랜드에 아깝게 3-2로 패했지만 아프리카 축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세계에 심었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는 조별 리그 예선에서 불가리아(3-0승)와 그리스(2-0승)를 연파했지만 아르헨티나에는 1-2로 패했다. 조별 리그 1위로 16강에 진출해 이탈리아와 격돌했는데, 82분간 1-0으로 앞서다가 막판에 두 골을 내줘 8강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는 2년 뒤인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우승해 월드컵의 아쉬움을 달랬다. 특히 나이지리아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따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때 본 프레레 전 한국 대표팀 감독이 나이지리아 올림픽 팀의 코치를 맡았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는 카메룬이 축구에서 금메달을 땄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전에는 세네갈이 프랑스를 1-0으로 물리치며 이변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세네갈은 과거 자신들을 식민 통치했던 프랑스를 꺾고 8강까지 내달렸다. 이처럼 아프리카 축구는 세계적인 강호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기는 이변의 역사를 써 더 유명해졌다.

아프리카 축구가 왜 강한지는 아프리카에서 축구가 차지하는 사회·문화적인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다. 아프리카인에게 축구는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1990년 카메룬이 성공한 뒤부터 아프리카의 각종 축구 대회에는 유럽의 스카우터들이 몰려들었다. 우수한 기량을 지닌 어린 꿈나무들을 유럽으로 데려간 뒤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어린이들이 프로 선수가 되었을 뿐 나머지는 부랑자로 전락하는 역기능도 낳았다. 그래서 유럽 축구계에는 아프리카인들을 상대로 한 현대판 노예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가다피 리비아 대통령은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이 노예제도를 부활시켰다.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은 부유한 나라의 노예가 되고 있다”라며 아프리카 소년들의 무분별한 유럽 축구계 유입을 비판하고 나섰다.

프랑스 대표팀은 아프리카 대표팀?

이런 비판이 있지만,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의 실력만은 탁월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번독일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골을 터뜨린 코트디부아르의 드로그바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연패를 달성한 첼시의 주전 원톱 공격수이다. 역시 리그 2연패를 차지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붙박이 공격수인 에투는 카메룬 출신이다. 비록 카메룬이 독일월드컵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에투의 빠른 스피드와 골 결정력은 당대 최고이다.

한국과 평가전에서 뼈아픈 골을 터뜨린 가나의 에시엔(첼시) 몸값은 4백80억원이나 된다. 가나의 모래밭에서 볼을 차던 에시엔은 아프리카 축구 선수로 유럽 드림을 이뤘다. 아프리카 출신 스타의 효시는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이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에우제비우는 이탈리아를 물리친 북한을 맞아 네 골을 쏟아넣으며 일약 스타로 등극했다. 이렇듯 아프리카 선수들에게 축구를 처음 가르친 이들은 식민지 국가였다.

이민자로 제2의 조국을 위해 뛰는 대표적인 선수는 프랑스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 지네딘 지단이다. 지단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계이다. 마켈렐레는 콩고, 비에라는 세네갈 출신이다. 부상으로 월드컵 출전이 무산된 시세는 코트디부아르이고 시세를 대신해 프랑스 대표팀에 발탁된 시드니 고부는 베닝이 고향이다. 프랑스의 국가 통합 차원에서 그야말로 실력으로 뽑힌 이들은 ‘레 블뢰(파란색) 군단’의 일원으로 뛰며, 프랑스 아트 사커의 위용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선수들이 유럽의 유명한 클럽에서 뛰거나 식민 본국 유니폼을 입으며 스타가 되지만 정작 아프리카 국내 축구의 발전은 더디기만 하다. 조금만 재능을 보여도 유럽에 헐값으로 팔려가는 현실 앞에서 아프리카는 단순히 유럽에 선수를 공급하는 시장으로 전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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