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엔진’ 박지성 한국 축구 몰고 나가다
  • 프랑크푸르트 · 주진우 기자 ()
  • 승인 2006.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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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을 통해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자 리더로 우뚝 선 박지성. 그의 발끝에서 한국 축구가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그가 그라운드에 나서면 한국 축구의 격이 달라진다. 한국 축구 대표
 
먼지가 펄펄 날리는 맨땅. 운동장은 얼음판처럼 미끄러웠다. 태클을 하면 엉덩이에 불이 났다. 무릎은 까져서 성할 날이 없었다. 축구 선수들은 빨간약(머큐로크롬)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살았다. 비가 오면 축구화가 진흙탕에 박혔다. 월드컵을 비가 오는 날 맨땅에서 하면 우승도 가능할 텐데…. 태극 마크를 달고 처음 밟아본 잔디 구장에서는 발이 푹푹 빠져 ‘똥볼’을 차기 바빴다. 축구를 못하면 두들겨 맞고, 잘하면 선배들에게 구박당했다. 축구부 합숙 훈련은 극기 훈련이었다. 이렇게 한국은 축구라는 나무가 자라기에는 토양이 너무나 척박했다. 

박지성(25·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평발에 키는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았다. 몸은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개구리를 먹으면 키가 자란다는 소리에 지성의 부모는 개구리를 잡기 시작했다. 개구리를 아무리 먹어도 아들의 키는 자라지 않았다. 장어즙·개소주…. 시장에서 정육점을 하는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도 아버지 박성종씨는 축구를 하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의 여느 부모들처럼.

부모의 ‘지성’으로 지성은 1백75cm까지 자랐다. 그러나 운동선수로는 모자랐다. 이것이 지성을 몹시 괴롭혔다. “학창 시절 내내 왜소한 체격 때문에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체격이 문제라면 기술로 승부하자는 결심으로 한순간도 공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공만 있으면 집 주변이나 방 안이 모두 훈련장이었다. 공을 몰며 뛰고 또 뛰었다.”

1999년 수원공고를 졸업할 때 지성은 기술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날릴  만큼은 아니었다. 축구판의 계산법을 빌리자면 지성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겨우 갈 만한, 지방대에는 후보 선수 한 명을 데리고 갈 수준이었다. 그는 관동대에 가려고 했지만 수원공고에서 후보 두 명을 끼워 보내려다 무산되었다.

박지성은 집안 형편 때문에 고교 졸업 후 수원 삼성에 가고 싶었다. 구단은 박지성의 체력이 약하다며 테스트를 요구했다. 아버지 박씨는 아들을 위해 자기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보약까지 먹여 구단 테스트에 참가시켰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박지성은 보름 만에 보따리를 쌌다. “오늘의 나를 만든 밑거름은 당시의 한(恨)이다”라고 박지성은 회고했다. “(고교 때까지) 키가 크거나, 공격이건 수비건 특별한 장기라고는 없었다. (대학이나 프로 팀에서) 날 탐내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내 인생은 늘 그랬기 때문에 깡다구 하나로 버텼다.”

‘프로 입단 불발’ 한 안고 연습 또 연습

지성은 하나를 배우면 수백 번 되풀이하는 지성을 보였다. 연습에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한눈을 팔지 않은 박지성은 서서히 기술과 함께 강철 체력을 갖춘 선수로 변모한다. 체력은 이제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 되었다. 올림픽 대표 시절 태릉선수촌에서 불암산을 오르는 크로스컨트리를 할 때마다 박지성은 축구 선수들 가운데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전 종목 선수를 통틀어서도 3위에 오르며 강철 체력을 자랑했다.

박지성, 그를 따라 이제 한국 축구가 성장하기 시작한다.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을 발견한 것은 그 자신에게나 박지성에게나 큰 행운이었다. 한국 축구에는 더더욱 그랬다. 기본기가 부족한 한국 축구의 약점을 히딩크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빠른 스피드로 돌파하려했다. 그리고 90분간 줄기차게 그라운드를 누비며 상대방을 압박하고,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멀티 플레이어를 찾았다. 이런 히딩크의 갈증을 단박에 해갈하는 선수가 있었으니, 박지성이었다. 박지성은 고종수·윤정환·이관우 등 천재 소리를 듣는 선수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찼다.

“평소 말수가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타 여자 아이 같다. 하지만 그라운드에만 나가면 완전히 헐크로 변해 상대를 제압한다.” 칭찬에 인색한 히딩크도 박지성을 추워올렸다.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팀의 코치를 맡은 최진한씨는 “지성이는 감독이 여러 포지션에 기용했는데 그때마다 제 몫을 해냈다. 워낙 지성이가 성실했기 때문에 히딩크 감독이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지성이를 많이 예뻐했다”라고 말했다. 한국 대표팀의 핌 베어벡 코치는 “박지성은 모든 감독이 좋아할 만한 선수다”라고 말했다.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지성의 플레이는 빛나지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진짜 팀의 살림꾼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지혜로운 별(그의 이름)’이 광채를 뿜기 시작한다. 지성은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헤딩골을 잡아냈다. 세계 랭킹 1위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 챔피언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는 왼발 슛을 성공하며 며칠 사이에 더 나은 기량을 선보였다. 한국 팀이 유럽 팀만 만나면 겨뤄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리는 지긋지긋한 ‘유럽 징크스’를 내동댕이칠 수 있었던 데는 박지성의 공이 컸다. 당시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었던 이용수씨는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이 대패해 자신감이 꺾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박지성이 팀의 사기를 살려놓았다”라고 말했다.

심장 박동, 다른 선수들의 추종 불허

본게임 2002년 월드컵에서 지성의 맹활약은 계속된다. 포르투갈전에서는 한국의 숙원인 16강 진출을 확정짓는 골을 성공시킨다. 이영표의 롱패스를 공중에서 볼의 방향을 바꾸며 수비수 한 명을 제친 뒤 날리는 환상적인 왼발 슛이었다. 우리나라 축구 선수 가운데 이 정도의 기술을 보인 이는 일찍이 없었다. 미국 AP통신은 “한국의 박지성이 포르투갈을 기절시켰다”라고 타전했다. 스물한 살 박지성은 세계 변방의 한국 축구를 세계의 중심으로 몰고 갔다.

월드컵 성공을 등에 업고 박지성은 이영표와 함께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했다. 곧바로 자리를 잡은 이영표와 달리 박지성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부상에 이은 플레이 부진으로 지성은 동료인 마테야 케즈만의 비난을 받았다. 홈팬 관중이 그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지성은 피나는 자기 관리와 훈련으로 이내 자신을 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박지성은 연습장과 집 이외 다른 데 가는 일이 거의 없다. 집에서는 책을 읽거나 <플레이 스테이션2>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게 일상의 전부다. 결국 박지성은 통쾌한 골 행진을 이어가다 2004~2005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다시 진가를 발한다. 이탈리아의 명문 AC 밀란과의 2차전에서 선제골을 터뜨리며 세계 축구 팬에게 그의 존재를 알렸다.

챔피언스리그의 성공을 발판으로 지성은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이 팀에서 뛰는 것 자체가 그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빅리그 톱클래스 구단에서 뛰는 첫 아시아  선수다. 일본 기업의 스폰서로 이탈리아리그의 하위팀 페루지아에 진출했던 일본의 나카타와는 격이 다르다.

2005년 6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그를 영입했다. 하지만 현지 언론은 그의 기량이 맨체스터급이 아니라고 평가절하했다. “박 벤치(Park Bench)가 될 것이다” 혹은 “아시아 지역 마케팅 차원에서 티셔츠를 팔기 위해 데려온 동양의 꼬마”라는 비아냥이 잇달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는 로이 킨, 라이언 긱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앨런 스미스 등 미드필더요원이 즐비했다. 공격수에서는 판 니스텔로이와 웨인 루니가 있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마저 “맨유에서는 벤치 신세를 면치 못한다. 더 배우고 가라”라며 만류할 정도였다.
 


“프랑스·스위스 공략법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박지성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예상을 뒤엎고 주전 자리를 꿰찼다. 에버턴과의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에 모습을 보이더니 리그 38경기 중 34경기에 출전했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데뷔 첫해에 이런 성적을 거둔것은 한마디로 놀랍다. 안쓰럽게 그라운드를 누비며 팀에 헌신하는 그에게 판 니스텔로이와 웨인 루니 등 팀 동료들도 찬사를 보냈다.

지성의 성공 원동력은 타고난 성실함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메디컬 테스트에서 그의 심장 박동수는 1분에 40회가량. 다른 축구 선수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라톤 선수 이봉주와 거의 비슷하다. 박지성에게 비판적이었던 언론들도 ‘산소통’ ‘맨유의 신형 엔진’ ‘번개 같은 침략자’ ‘3개의 폐를 지닌 선수’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영국 언론은 “박지성의 성공은 중노동에 가까운 끊임없는 연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들도 박지성의 가치를 성실성에서 찾은 것이다.

프리미어리그에서 터득한 경험으로 그는 한국 축구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있다. 2002년 재능 있는 한국 선수 중 한 명에서 지금은 확실한 한국 팀의 리더가 되었다. 한국 팀은 박지성이 뛰느냐 안 뛰느냐에 따라 경기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
토고전 승리는 박지성의 발끝에서 이루어졌다. 경기가 시작되자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토고 선수들보다 우리 선수들이 긴장했다. 패스를 하는 것도, 패스를 받는 것도 안 됐다. 수비진에서 공을 돌리는 것은 위태로웠다. 마치 폭탄 돌리기를 하는 듯했다.

하지만 박지성은 격이 달랐다. 박지성은 스코틀랜드 전지훈련에서 발목을 부상당해 몸 상태는 100%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 공이 가면 플레이가 안정감이 있었고 무언가 만들어졌다. 길이 보였다. 박지성이 공을 잡으면 토고 선수들이 멈칫거렸다. 안정환과 이천수의 활동 반경도 넓어졌다. 최진한 전 코치는 “박지성이 2002년에 비해 체력이 더욱 좋아졌고 축구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인 시야가 넓어졌다. 어떻게 경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아는 확실한 리더가 되어 팀을 이끌었다”라고 말했다.

토고는 반칙이 아니면 웬만해선 박지성을 막을 수 없었다. 박지성은 중앙선 근처에서 상대편의 집중적인 반칙에 시달렸지만, 그는 자신을 집중 마크하는 수비수의 반칙을 영리하게 유도해냈다. 결국 토고의 주장이자 수비의 핵인 장 폴 야오비 아발로는 박지성을 막으려고 무리한 파울을 저지르다 퇴장당했다. 페루의 유력 일간지 엘 코메르시오는 박지성을 ‘재앙의 예언자’라고 표현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의 스트라이커 주앙 핀투는 박지성을 뒤에서 태클하다 레드카드를 받아 패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박지성은 자신에게 수비수의 견제가 집중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기회와 공간을 내주는 데 더 신경을 쓴다. 토고에게 뽑은 둘째 골은 박지성의 보이지 않는 어시스트가 결정적이었다. 박지성이 돌아나가자 수비가 쏠렸고 이를 틈타 안정환이 골을 뽑아낸 것이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 케이블 ESPN은 “토고 팀은 박지성 선수를 막는 데 실패해 경기에서 졌다”라고 분석했다.

프랑스와 스위스는 박지성의 플레이만 차단하면 한국은 문제없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하지만 박지성은 공략법을 잘 알고 있다. 토고와의 경기가 끝난 뒤 박지성은 “나에게 거는 국민의 기대를 잘 알고 있다. 프랑스·스위스와의 경기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준비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박지성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세계 축구 팬에게 ‘박지성’ 명함을 내민 것이 바로 프랑스와의 경기였다. 2002년 월드컵 직전 한국 팀은 챔피언 팀이자 세계 랭킹 1위 프랑스를 만났다. 지성은 크로스된 볼을 오른발로 어루만지듯 트래핑하며 수비수를 간단히 제치고 벼락같은 왼발 강슛으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림 같았다. 그라운드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베르캄프의 우아한 볼 터치를 보는 듯했다. 2002년 월드컵 성공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체육 선생이 되겠다던 정육점집 아들은 성실했다. 체력이 약한 것은 지독한 연습으로 보완했다. 기술이 떨어지는 것은 넓게 보고 빨리 판단하며 한발 더 뛰는 것으로 만회했다. 박지성의 장점은 한국 축구가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박지성의 길은 한국  축구의 길이 되었다. 이제 박지성은 한국 축구로 통한다. 그는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다.

박지성은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상황을 극복해왔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었고, 유럽에서 성공 신화를 썼다. 이제 내쳐 박지성은 독일월드컵에서 축구 선수로서의 존재 목적을 승리로 확인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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