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레임덕’ 파도치니 경제 정책 표류하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6.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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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간 손발 안 맞고 정책 집행 일관성 떨어져

 
“결국 물 건너가는 것 아니냐.”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6월22일 “중·장기 조세 개혁 방안을 올해 안에는 정책화하지 않겠다”라고 밝힌 뒤 시장에서 나온 반응이다. 이날 한부총리는 국회 재경위 업무 보고에서 “중·장기 조세 개혁 방안은 국민적 동의를 구하고 여론을 수렴하면서 추진할 계획”이라며, 올해는 일몰이 도래하는 57개 각종 조세 감면 검토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로써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 과제 중 하나였던 조세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대선 정국으로 접어드는 내년에 민생과 긴밀하게 닿아 있는 주요한 정책 결정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조세 개혁이 표류할 조짐은 이미 올 초부터 감지되었다. 재정경제부는 본래 참여정부 출범 이후 야심차게 준비해온 중·장기 조세 개혁안을 지난 2월 공청회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청회 직전 정부가 검토하고 있던 조세 개혁안이 언론에 유출되면서 여론의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재원 확충을 위해 서민·중산 층에 대한 세금 부담을 강화하게 되어 있는 대목이 특히 여론의 반감을 샀다. 이에 부담을 느낀 정치권은 중·장기 조세 개혁과 관련된 모든 일정을 선거 뒤로 미뤄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뒤에도 공청회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 선거 대패로 풍비박산이 난 여당이 선거 전보다 더 극심한 여론 눈치보기 작전에 돌입해서다. 한덕수 부총리의 발언이 있기 전날까지도 재경부 담당 공무원은 “구체적으로 잡힌 일정이 아직 없다.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중이다”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사기 떨어진 재경부, 손 놓고 바짝 엎드려

문제는 중·장기 조세 개혁안이 물 건너가면서 다른 경제 현안들도 연쇄적으로 흔들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다. 조세 개혁안과 더불어 선거 뒤로 밀려 있던 저출산·고령화 대책, 근로소득보전세제(EITC) 등의 정책 추진 일정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선거가 끝난 직후인 6월7일 보건복지부는 ‘제1차 저출산 고령화 기본계획 시안-새로마지(새로움과 마지막을 합성한 조어) 플랜 2010’을 발표했다. 한국조세연구원은 지난 6월22일 공청회를 열어 정부 용역을 받아 작성한 ‘우리 현실에 맞는 근로소득보전세제 실시 방안’을 공개했다. 근로소득보전세제란 일하는 저소득층의 소득을 정부가 보전해줌으로써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제도이다.

이들 제도를 추진함에 있어 공히 핵심은 역시 재원 조달이다. 근로보전소득세제의 경우 1차 연도인 2009년까지 연간 1천5백억원가량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조세연구원은 추정했다. 저소득 근로자에서 저소득 자영업자까지 대상이 확대되는 2013년 이후 소요 예산은 연간 1조~2조5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보건복지부는 1차 연도인 2010년까지 저출산 고령화 대책 실행에 필요한 예산을 32조원으로 추산했다.
 
 
이처럼 엄청난 돈을 장기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조세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할 중·장기 조세 개혁안이 결국 제대로 된 논의 한번 거치지 못한 채 용도 폐기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참여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각종 경제정책이 이렇게 표류하게 된 것은 선거 패배 이후 여당이 동요하고 있는 데 따른 영향이 크다. 재경부의 한 고위 공무원은 “재경부야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여당이 계획을 바꾼다면야 어떻게 하겠는가. 법률 제·개정권은 국회에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각 정부 부처 또한 거의 손을 놓고 있는 분위기다. 그 중에서도 재경부는 특히 정도가 심하다. 한 관계자는 “재경부가 경제정책을 총괄하지 못한 지는 오래됐다. 참여정부는 재경부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위원회를 만들었던 것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재경부가 참여정부 주요 경제정책의 근간을 만들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합부동산세를 포함한 고강도 부동산 대책, 중·장기 조세 개혁,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 등이 그것이다.

그랬던 재경부가 요즘 바짝 엎드려 있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과 관련해 변양호 전 금융정책국장이 구속되고 전·현직 고위 공무원들이 줄줄이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조직 전반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관가에서는 “요즘 경제 부처 중 목소리 내는 데는 보건복지부밖에 없다”라는 우스갯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른바 실세 장관으로 통하는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이 국민연금 개혁을 적극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연금 개혁 또한 참여정부의 빼놓을 수 없는 역점 사업이다.

단 연금 개혁을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다. 국민연금에 앞서 공무원연금·사립학교교직원연금 등 특수직역 연금에 먼저 칼을 대야 한다는 비판 여론이 그것이다. 지난해 6천억원 수준이었던 공무원연금 적자는 2010년 2조7천억원, 2020년 13조8천억원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이를 메우기 위해 국민 혈세가 쓰이는 만큼 공무원연금부터 개혁하는 것이 순서라고 연세대 김진수 교수(경실련 사회복지위원장)는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은 6월1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구체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공무원연금 보험료율을 국민연금과 비슷하게 맞추면서 퇴직금은 공무원연금에서 분리시키는 방식이다. 유장관은 행정자치부·교육부 등이 현재 연금 개혁안을 마련 중인 만큼 이들 유관 부처에 이 같은 방안이 포함된 특수직역 연금 개선 논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른 부처의 반응은 싸늘하다. 행정자치부 담당 공무원은 “그런 요청을 전혀 공식적으로 받은 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나아가 일반 실무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부처 간에 큰 분쟁이 일었을 것이라며, 부처마다 소관 업무가 다른 만큼 그런 요청을 하고 싶었다면 먼저 관련 부처의 의견을 받는 것이 제대로된 절차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공무원은 “더 이상 <100분 토론> 사회자도 아니면서 (유장관이) 말로 혼자 앞서가는 것 같다”라고 비아냥댔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여당 내에서도 자신의 연금 개혁안에 호응하는 목소리가 없다 보니 정치인 출신 장관이 ‘오버’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오리가 뒤뚱대듯 경제 부처 간에 손발이 맞지 않고 정책 집행에 일관성이 떨어지는 이 같은 상황은 말 그대로 ‘경제 레임덕’이라 할 만하다. 재경부 고위 관계자는 “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불확실성, 다시 말해 정책의 일관성 상실이라는 사실은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일관성을 추구할 뿐 이를 관철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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