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을 지키는 깐깐한 선생님들
  • 김상익 편집위원 ()
  • 승인 2006.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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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익의 교육일기]
 
미국의 학교는 9월에 시작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몇 학년에 집어넣을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미리 계획하고 준비된 유학이 아니었던 탓이 크다). 제 학년을 찾아간다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1·2학년에 해당하는 10학년과 11학년에 등록해야 하지만 그럴 경우 아이들이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그런다 해도 어쩔 수 없이 6개월을 꿇게 되는데, 학년을 하나씩 낮추자니 이번에는 또래들과 무려 1년 6개월 차이가 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일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 마치지 않고 귀국한다면 또다시 6개월을 까먹고 삼수생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고심 끝에 결국 9학년(중 3)과 10학년(고 1)으로 결정했다.  

입학 첫날 아이들은 학교에서 주는 유인물을 잔뜩 싸들고 돌아왔다. 학교 운영과 규칙에 대한 소개 글 정도는 대충 읽어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우리로 치면 ‘가정 환경 조사서’에 해당하는 유인물은 학부모에게 내주는 숙제나 다름없었다. 특히 부모가 생각하는 자녀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쓰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막막했다. 

대여섯 문장 영작하는 일쯤이야 아무리 영어가 약하다 해도 사전 몇 번만 들추면 해결할 수 있지만, 빈 칸에 무슨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할지 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어야 할 말이 있을 것 아닌가. 어쨌든 한 시간 정도 억지로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쓸 내용이 대충 정리되고, 심지어 내가 아이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뿌듯한 자부심이 솟아나기까지 했다(끝끝내 반성은 하지 않는?). 

많은 유인물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학과목 선생들이 작성한 강의 계획표(syllabus)였다. 나는 강의 계획표라는 것을 대학에 입학해서야 처음 받아본지라 ‘고삐리’들이 가져온 강의계획표를 신기한 물건이나 되는 듯이 감탄하며 읽고 또 읽었다. 유인물에는 수업 목표와 강의 진행 방법, 학기 중에 읽어야 할 도서 목록, 숙제 작성 및 제출 요령, 숙제를 안 하거나 늦게 냈을 때의 감점 기준, 지각 또는 결석에 따른 벌칙, 수업 시간에 갖추어야 할 예절 등이 깐깐하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의 강의 계획표 보고 ‘감탄 또 감탄’

누구나 처음 시작할 때는 의욕이 과잉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느슨해지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그래서 내심으로는 미국 선생이 그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중간 성적표가 집으로 배달되었을 때 나는 혀를 내둘렀다. 성적표에는 각 과목의 숙제 성적과 수업 시간에 치른 퀴즈 및 시험 성적 등 그 기간의 모든 평가 항목에 대한 점수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까지 적혀 있으므로 성적표만 꼼꼼히 검토하면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지간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엄정한 평가 자료라고 나는 생각했다(물론 학생은 정당한 이유를 대고 정정 받을 기회가 있다). 그리고 이런 성적들이 쌓여 GPA, 우리로 치면 내신 성적이 산출된다. 

대학 교수도 아닌 고등학교 선생이 자기 나름의 교육 목표와 계획에 따라 학생을 가르치고, 정해 놓은 원칙대로 학업을 평가하는 모습이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질투심이 일었다. 계획이고 뭐고 없이 대학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이 합격시키기 위해 수학 문제를 풀게 하고 영어 문법을 욱여넣던 나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의욕적인 선생님들이 수업 도중에 약간 샛길로 빠져 교양있는 잡담(?)을 할라치면 누군가가 볼멘소리로 이렇게 외치곤 했었다. “선생님, 진도 나가요.” 참고 도서라면 <수학의 정석>과 <정통종합영어> 뭐 그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숙제 안 하면, 몸으로 때웠다. 

지금이라고 해서 30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머리가 좀 길어지고, 교복이 예뻐지고, 체벌이 거의 없어진 정도? 지금의 입시 제도가 존속하는 한 앞으로도 한국의 공교육은 내용 면에서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아니 바뀔래야 바뀔 수가 없다. 그러니 불쌍한 것은 학생이고 고달픈 것은 학부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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