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으로 부활한 ‘범작’들
  • 유선주 (<드라마틱> 에디터) ()
  • 승인 2006.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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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모> <연애시대> 등 다시 보기계의 ‘명작’ 등극…탄탄한 완성도·실험성이 비결

 
조선여형사 다모 (MBC, 2003)
드라마 시청자는 기본적으로 보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존 드라마의 공식과 관습을 깨고 혁신을 이룩한 작품들은 대개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모>가 그 대표적인 사례. 고화질(HD) 드라마의 효시인 다모는 사전 제작을 통해 영화적인 활극 연출이 가능했다. 치밀한 추리 수사극의 각본, 명대사로 가득한 멜로 신들은 화제가 되었으나 시청률만 보았을 때는 종영까지 15%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다모>는 비록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을지언정 한국 드라마의 진화를 갈망해왔던 ‘다시 보기’ 시청자들로부터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다모 폐인’이라는 이름의 이 지지자들은 단순히 온라인에서 감상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커뮤니티를 조직화하고 최초로 드라마 팬진(Fanzine)을 제작하는 등 적극적인 드라마 소비 행태를 보여주었다. ‘다모 폐인’은 이후 등장하게 될 ‘미사 폐인’ ‘부활 패닉’ 등 조직적인 드라마 팬덤의 전범이 되었다.

 
연애시대 (SBS, 2006)
비록 이혼했지만 차마 상대의 곁을 떠날 수 없었던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았던 드라마 <연애시대>에는 스타가 없었다. 대신 감우성과 손예진을 비롯한 양질의 배우들이 있었다. 또한 <연애시대>는 별다른 판타지를 제공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현실’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한 번 더 들여다보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고단한 까닭인지, 혹은 드라마의 주 시청자층인 청년층이나 중장년이 아닌 ‘30대 초반의 현실’을 다루었기 때문인지 이 드라마는 방영 중에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종영 이후에 상황은 역전된다. <연애시대>에 열광했던 소수로부터 드라마의 높은 완성도에 대한 찬사가 입소문으로 전해지면서 이 드라마는 특히 30대 남성들로부터 뒤늦게 메아리를 받고 있다. 관계에 관한 친숙하고도 속 깊은 사유를 담은 <연애시대>의 파장은 바야흐로 종영 이후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부활 (KBS, 2005)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스릴러 장르 관습에 충실한 드라마 <부활>은 시청률 50%의 국민 드라마가 되기에는 애초부터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과 맞붙었던 <부활>은 초반 9%의 저조한 시청률로 고전했으나 입소문이 퍼지고 인터넷 다시 보기라는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전편을 모두 본 이들이 생겨났다. 시청률이라는 숫자로 가늠할 수 없는 충성도 높은 팬들은 드라마 안의 상징과 복선, 감춰진 의미를 읽기 위해 드라마를 복습하고 예습하며 게시판에 모여 이야기를 즐긴다.
이처럼 능동적인 ‘부활 패닉’들 앞에서 ‘시청자들의 수준을 13세에 맞춰서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작자들의 공공연한 원칙은 변명에 가깝다. <부활>이 해낸 ‘부활’은 이른바 ‘대박 드라마’가 나오기 힘든 지금 드라마 판의 희망적인 대안이다.

 
네 멋대로 해라 (MBC, 2002)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신세대는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충동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주인공 복수와 경의 사랑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한 젊은이들의 치기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네 멋대로 해라>의 세계 안에는 복수와 경의 부모들, 즉 기성세대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의 이유들과 가족 간 갈등의 무게가 오롯이 담겨 있다.

기성세대의 삶과 가치관에 저항하지만 그들에게 궁금증을 갖고 품어 안고자 하는 젊은 세대는 ‘사랑의 단상’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나는 당신이 아프다”처럼 더없이 몸에 와닿는 대사로써 표현된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네멋 폐인’들의 열광은 <네 멋대로 해라>가 환상적인 도피의 공간이어서가 아니다. 일상의 고통과 무게들을 거듭해서 환기시키며 ‘그럼에도’ 삶을 살아낼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스터 굿바이 (KBS, 2006)
월드컵 기간 결방, 동 시간대를 장악한 MBC <주몽>의 선전이라는 이중고 안에서 <미스터 굿바이>는 묵묵히 갈 길을 간다. 이제는 식상하기조차 한 주인공의 불치병, 부유한 남자와 씩씩한 처녀 가장의 연애라는 외피는 오히려 이 드라마가 갖춘 진정한 미덕을 가리는 듯한 인상이다.

충무로나 여의도에서는 공히 소재의 고갈을 말한다. 하지만 같은 ‘조폭’이 등장해도 한쪽에서는 신물 나는 조폭 코미디를 재생산하고 다른 쪽에서는 누아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미스터 굿바이>는 ‘불치병’과 ‘드센 여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신파와 억지웃음으로 호소하는 대신 슬픔을 정제하고, 꽉 짜인 설정으로 의표를 찌르는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미스터 굿바이>는 비록 10%대의 저조한 시청률이지만 KBS 드라마 다시 보기 서비스 1위라는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발리에서 생긴 일 (SBS, 2004)
해외 로케에이션, 청춘 스타들에, 재벌 신데렐라 설정까지, <발리에서 생긴 일>(이하 발리)의 시작은 시청자들이 물리도록 보아왔던 드라마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드라마는 점점 이상해졌다. 초반부 설정으로만 여겨졌던 인물들의 비참한 삶은, 끝없이 나락으로만 빠져들었다. 여인은 비루한 삶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지만 숱한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재벌가의 남자는 흡사 마피아처럼 자신을 옥죄는 규율 속에서 발버둥치지만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가난한 남자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으로 무장하고 재벌들에 대한 복수전을 감행한다.

계급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비극적 ‘재벌 누아르’ <발리>는 방영 당시에도 30%대를 웃도는 높은 인기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만의 처절한 흡인력은 종영 후 2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팬들로 하여금 공식 홈페이지의 다시 보기 서비스와 게시판에 꾸준히 출석 도장을 찍게 만들면서 ‘다시 보기 세계’의 고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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