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지하’라니 벌써 서늘하지 않은가
  • 김애란 (소설가) ()
  • 승인 2006.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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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
 

처음 서울에 올라왔던 해, 서울 이문동에 방을 하나 얻은 적이 있다. 세 평 남짓한 크기에 천장만 기형적으로 높은, 훌쭉하고 서늘한 방이었다. 처음 방을 보러 갔던 날, 작은 서랍장만한 크기의 철제문을 열고, 그 깊숙한 서늘함 속으로 머리를 디밀었던 때의 느낌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내가 시골에서 가져온 살림은 책장과 옷장, 컴퓨터가 전부였다. 컴퓨터는 엄마가 대학 입학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그것은 내 방에 있는 물건 중 가장 비쌌고 덩지가 컸다. 나는 컴퓨터로 겨우 워드 작업밖에 할 줄 몰랐지만, 그것은 마치 엄청난 용량과 기능을 가졌으면서도 인간을 위해 고작 커피믹스를 타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미래의 로봇처럼 무능하고 다정해 보였다. 나는 내게 컴퓨터가 있다는 것, 그리고 방이 있다는 게 기뻤다.

그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나는 모노륨 장판의 그 선득한 느낌이 좋아 방바닥에 볼을 대고 온종일 엎드려 있었다. 혹은 내가 이사 오기 전, 그곳에서 아이를 만들어 나갔다는 젊은 부부의 얕은 숨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는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나는 전화를 하고, 숙제를 했다. 이따금 누군가 문 밖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내 청춘이 머리 위로 흘러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몇 달을 지냈다.

그러던 어느 한여름 밤, 몇 번씩 물을 끼얹어도 몸이 식지 않았던 무덥던 날, 그곳에서 나는 <지하생활자의 수기> 를 읽었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라는 멋지고 바보 같은 혼잣말로 시작되는 소설이었다. 그해 여름, 나의 독서 경험은 당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셋방의 시멘트 벽, 그 육면(六面)의 껍질 안에 고스란히 담겨 하나의 감각적인 풍경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침 발라 넘겼던 19세기 남자의 중얼거림, 이따금 저 혼자 열려 사람을 놀라게 하던 내 방의 벽장문, 그 문을 다시 닫고 누웠을 때 찾아온 지하생활자의 치통, 내가 찬물을 끼얹고 돌아온 방 안에서 울고 있던 러시아 창녀, 꺼진 컴퓨터 화면 위로 얼비치던 모든 것과, 좁은 방안에 넝쿨처럼 가득하던 컴퓨터 전선들, 건넛방 할머니의 기침 소리, 지하생활자의 가난, 그러다가 사내의 독백이 하도 통렬해 어느 순간 나는 진지해졌고, 어느 때는 너무 재미있어 혼자 ‘으하하하’ 웃기도 했던 것인데- 정신을 차려 보면 아까 닫은 벽장문이 저 혼자 다시 열려 있고, 지하생활자의 불평도 다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쿨럭쿨럭 새까만 기름을 끊임없이 빨아 먹으며 돌아가던 그 방에서, 항상 방세보다 기름 값이 더 많이 들었던 그 식욕 좋은 방에서, 나 자신과, 지하생활자와, 바깥의 소음과, 도스토예프스키와, 방 안의 모든 것들과 함께 통째로 소화되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한참 후, 문득 좋은 책을 덮고 났을 때 찾아오는 고요가 잠시 지나갔고, 세 평짜리 어둠 속에 홀로 누웠을 때, 천장 위론 야광별이 총총 빛났던 것도 같은데…….

이따금 나는, 독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책과 나 사이의 뻥 뚫린 그 사실적인 거리, 그리고 그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며 독서를 방해하는 온갖 물리적인 요소들- 이를 테면 전화, 소음, 요의, 어깨 결림, 엄마의 심부름, 환승역까지의 거리 등- 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거리 사이에 끼어들 만한 상황, 감정, 방해물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독서를 비밀처럼 풍요롭게, 사적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하고.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어느 곳에서 읽어도 좋을 책이지만, 내겐 ‘그 방’에서 읽어 좋은 책이기도 했다. 올 여름 어느 무더운 밤, 나는 또 다른 장소에서 이 책을 한 번 더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하’라니, 벌써 서늘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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