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호 납치했던 해적들의 정체
  • 소말리아 · 김영미 (프리랜서 프로듀서) ()
  • 승인 2006.07.3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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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호 석방 직전 현장 취재한 김영미 PD 특별 기고

 
(편집자 주 : 지난 4월4일 동부 아프리카 소말리아 앞바다에서 우리 어선 동원호가 납치되었다가 100일이 지난 7월30일께 겨우 풀려났다. 이 배에는 한국인 8명을 포함해 선원 28명이 타고 있었다. 소말리아는 15년째 내전을 겪고 있는 전쟁 지역이다. 지난 석 달 동안 국내 언론인이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이곳에 분쟁 지역 취재 전문가인 김영미 프리랜서 프로듀서가 홀로 현지 취재를 감행했다. 김PD는 동원호가 석방되기 전인 7월25일 MBC를 통해 동원호 선원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줘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한편 외교통상부와 동원호 선주인 동원수산 측에서는 김영미 PD의 취재 동기와 취재 과정이 의심스럽다며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시사저널>은 김PD로부터 취재 후기를 받았다. 취재 과정의 의문점을 해소하는 한 편 방송에 내보내지 못했던 해적들 주변 이야기를 싣는다.)

 
왜 당신이냐? 왜 그곳에 갔느냐? 7월25일 MBC <PD수첩> 방송 이후 취재 의도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가 소말리아 취재를 결심한 것은 6월 중순 한 방송국 보도 기자의 푸념에서 비롯되었다. 그 기자는 외교통상부의 동원호 관련 브리핑을 보며 답답해했다. “외교부는 이렇다, 저렇다 하며 브리핑을 하는데 사실 우리(기자들)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니 그대로 받아쓸밖에 ...” 필자가 “직접 소말리아에 가보라”고 권하자 그는 “물론 직접 취재해보고 싶지만 회사에서 위험하다며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소말리아는 오랜 내전으로 기자들이 취재하기 어려운 나라 가운데 하나다. 필자는 ‘그렇다면 소속 회사가 없는 프리랜서인 내가 가야 하는 일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비롯한 전쟁 지역에 대한 취재 경험이 있어 분쟁 지역 취재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부터 동원호에 대한 자료 조사를 했다. 그러던 중 <APTN> <로이터> 같은 외신들이 이미 동원호에 승선해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APTN> 영상은 소말리아 현지 <APTN>  기자가 찍은 것이었다. 어렵사리 전화로 그 기자와 연결이 되었다. 6월27일 서울을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그리고 소말린란드의 하기사를 거쳐 7월3일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 도착했다.

마침 필자가 모가디슈에 도착했을 때 내전이 1991년 이래 최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범이슬람 세력이 뭉친 이슬람법정연대(UIC)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대테러연맹을 몰아내는 중이었다. 빨래판 긁는 것 같은 ‘드르륵’하는 총소리가 도시 곳곳에서 울렸다. 안전 지역 호텔로 피했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필자가 모가디슈에 오기 2주 전 스웨덴 출신 저널리스트가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바람에 외신 기자도 모두 떠나 프레스센터는 텅 비어 있었다.

 
7월5일께 이슬람법정연대는 모가디슈를 장악했다. 하나의 정치 세력이 이 도시를 수중에 넣은 것은 내전 시작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슬람법정연대 군대 행렬이 거리를 지나자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나 평화는 불완전해 보였다. 7월9일 동원호가 억류되어 있는 해안 도시 하라데레로 가기 위해 유엔 비행기를 타고 모가디슈 북쪽 도시 발드윈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이웃 나라 에티오피아 군인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이미 소말리아 내전은 동부 아프리카 국제전으로 비화하고 있다

필자로서는 소말리아 내전보다 동원호 문제에 관심이 컸기 때문에 서둘러 하라데레로 이동했다. 동원호 취재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이슬람법정연대 총사령관인 셰이크 하산 다히르 아웨이스(셰이크 하산)였다. 소말리아의 최고 실력자인 세이크 하산은 모가디슈에서 북쪽으로 7백20km 떨어진 굴구두드 엘부르에 기지를 차려놓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셰이크 하산은 동원호 나포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한 달 안에 하라데레로 진격해 동원호를 구출하겠다고 장담했지만, 에티오피아까지 참전한 마당이라 쉽지 않아 보였다. 셰이크 하산은 무장 해적들과 대면해야 하는 필자를 위해 특별 경호원 15명을 붙여주고 해적들과의 교신을 도와주었다.

하라데레 해적(그들은 스스로 소말리아 해군이라고 부른다)들은 취재를 가겠다는 필자의 전화를 받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한 차례 기자들이 몰려와서 찍어갔는데 또 취재할 게 있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지난 4월 동원호에 직접 올라 취재한 적이 있는 <APTN> 소속 스트링거(현지 기자)가 현지어로 설득해 겨우 취재 허가를 얻었다.

경호원 15명으로 ‘동원호 원정대’ 꾸려

 발드윈에서 하라데레까지 9백20km를 차로 이동했다. 필자와 통역, <APTN> 스트링거, 무장 경호원 15명으로 구성된 ‘동원호 원정대’였다. 우리는 연료와 장비를 끌고 움직였다. 모가디슈를 떠난 지  하루 반나절이 지난 7월12일 하라데레에 도착했다.

해적 두목이 사는 하라데레는 인구가 3백~5백 명쯤 되는 바닷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주민은 대부분 해적들과 해적들의 부인·아이들이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압둘라힘이라는 사람이 취재진을 두목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마당 한가운데 트럭 짐칸 위에는 기관총이 우뚝 서 있었다. 

셰이크 하산이 붙여준 무장 경호원들은 큰 도움이 되었다. 셰이크 하산 경호대는 하라데레 해적들과 같은 부족인 슐레만족이었다.  해적 두목은 내가 셰이크 하산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에 경계하는 듯했다. 미국 군함도 두려워하지 않는 해적이지만, 내일이라도 당장 여기로 진격해올지 모를 이슬람 실력자만은 겁내고 있었다.

 
해적들을 만나면서 내부 조직 구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 해적들은 원래 내륙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1년6개월쯤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해적 행위도 그때부터 시작했다.  해적단은 총 81명으로 휴대용 로켓추진수류탄(RPG7)이 최소 두 기가 있고 나머지는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조직원들은 나름대로 계급도 있고, 역할도 분담되어 있었다. 오비아 앞바다까지 나가 외국 선박을 납치하는 조직의 대장은 그렉이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다른 조직원들과 달리 모사수 지역 출신이다. 그렉이 지휘하는 ‘납치조’는 매일 아침 바다를 돌며 ‘거래처 순시’를 하고 먹잇감을 찾는다.

해적들을 통괄하고 협상을 주도하는 총두목은 모하메드 압디 아프웨니였다. 조직 간부들 사이에는 내부 분열의 낌새가 느껴졌다. 기자가 하라데레를 떠나던 날, 납치조를 지휘하는 그렉은 중의 통역에게 살며시 다가와 “선장에게 전해달라. (아프웨니를 따돌리고) 나와 직접 거래하자. 그러면 더 빨리 동원호를 풀어줄 수 있다”라는 비밀 제안을 했다. 두목과 부하·조직원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 외부와 통하는 유선 전화기는 세 대가 있었는데, 납치조 대장 그렉·통역 압둘라힘 그리고 두목 아프웨니가 하나씩 갖고 있었다. 그 외에 마을 한가운데 ‘라디오 하우스’라고 불리는 무전실이 있어서 무선 통신(햄)을 청취하는 기계가 있었다. 선박들 간의 교신은 무선 통신실을 이용하는 듯했다.

외교통상부는 해적들이 기자들을 이용해 언론 플레이를 한다며 필자의 취재를 비난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니 해적들이 미디어를 다루는 감각이나 개념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정부는 해적이 선장에게 강제로 KBS 전화 인터뷰를 시켰다고 말했지만, 선장 말로는 자신이 부인과 통화하고 싶어서 부탁해 겨우 이루어진 전화였다고 말했다. 또 정부는 해적들이 유엔 소속 선박을 납치한 이후, 국제적 압력을 받자 방송을 동원해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데, 그때 취재한 방송국이란 소말리아 동부 지역 방송국으로 외부에 전파되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언론 플레이를 하려면 가까이 있는 서방 세계의 AP·로이터 기자를 불렀으면 되는 일이었다.

해적 두목 아프웨니는 동원호에 승선해 선원들을 만나고 싶다는 필자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냥 하라데레 마을만 찍고 가라고 했다. “여기까지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왔다. 다른 외신들은 다 촬영을 했는데 왜 한국 언론인은 안 되냐. 해적들이 선원들을 학대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지 확인해봐야겠다”라는 식으로 설득했다. 하룻밤을 꼬박 갑론을박한 끝에 다음날 아침 동원호 승선 허락을 받았다.

7월13일 하라데레에서 18km 떨어진 해안까지 차로 이동했다. 멀리 수평선 위로 작은 배가 보였다. 구명 조끼를 입고 스피드 보트에 옮겨 타 배 가까이 가니 한글로 쓰인 ‘동원 628’이라는 글자가 눈에 뭉클하게 다가왔다.

조선족 3인, 한국인과 함께 가겠다며 귀환 거부

배에 오르자마자 필자는 “한국 사람이세요?”라고 물으며 선원들을 찾았다. “진짜 한국에서 오셨어요?”라는 한국말이 들려왔다. 항해사 김진국씨였다. 취재 시작 한 달 만에 드디어 선원들을 만난 것이다.

지친 표정의 선원들은 할 말이 많았다. 마치 말을 하지 못해 한이 쌓인 사람들처럼 그들은 필자가 질문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필자는 그저 카메라를 들고 서 있을 뿐이었다. 새벽 2시30분이 되도록 선원들은 잠을 자지 않고 말을 걸었다. 한국의 사정은 어떠한지도 묻고 가족들 이야기도 끝이 없었다. 

해적들은 삼엄하게 선박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선원들과 동거하는 해적들은 20명 정도로 갑판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조타실과 선장실 등에 세 명씩 뭉쳐 있었다. 모두 소총으로 무장했으며 갑판 가장 높은 곳에 기관단총이 있었다. 위성통신이 있는 선장실도 해적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이다.

해적들은 아침이면 총기 시험을 한다며 허공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선원들에 따르면, 자신들과 의사소통이 잘 안 될 때 해적들은 천장을 향해 총을 쏘며 고함을 지른다고 한다. 천장에 총알 구멍이 보였다. 동원호 주변을 지나가는 작은 소말리아 어선이라도 발견하면 위협 사격을 했다. 동원호는 정박하지 않고 일대 바다를 떠돌고 있었는데, 나포되기 직전 가득 차 있었던 연료는 현재 절반가량 남았다.

식량은 열흘 분의 쌀과 20일치 부식이 남아 있다고 선원들이 말했다. 선원들은 대체로 건강했지만 얼마 전까지 말라리아를 앓으며 고생한 선원들도 있었다. 선원들의 유일한 오락은 텔레비전에 연결된 비디오를 틀어 보는 것이다. 7월13일 선원들은 2002년도 한·일월드컵 한국 대 이탈리아전을 보고 있었다. 선원들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필자에게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독일월드컵 조별 예선이 어떻게 되었냐, 한국이 어디까지 올라갔느냐. 졸지에 필자는 축구 해설가가 되어 한 시간가량 독일월드컵을 요약해 전해주었다.

7월14일 아침 필자는 동원호에서 내려 하라데레로 돌아왔다. 홀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후 모가디슈를 거쳐 7월22일 귀국했다. <PD수첩> 방송이 나간 뒤 한 선원의 가족이 연락을 했다. “왜 우리 아들 얼굴은 방송에 나오지 않았느냐. 찍은 게 있으면 좀 필름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아프가니스탄·이라크·동티모르 등 숱한 위험 지역을 취재했지만 이번처럼 힘든 적은 없었다. 위험에 처해 있던 대상이 바로 우리 이웃이자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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