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베어 문 ‘출총제’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6.08.1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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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의장 ‘뉴 딜’ 언행으로 또 논란 가열…전경련 “전면 폐지”, 공정위 “대안 마련”

 
“정경 유착과 정경 분리의 시대를 거쳐, 이제 정경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한다. 경제인 사면, 출총제 폐지, 경영권 보호 제도 도입 등을 통해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는 마당을 만들 터이니 재계도 투자와 일자리를 늘려달라.” 뉴 딜(New Deal) 행보 중인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말이다.

모양새는 말보다 더 화끈했다. 지난 8월9일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은 강봉균 정책위 의장을 비롯한 의원 10여 명과 함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관을 찾았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을 비롯해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등 재계 대표 10여 명이 이들을 맞았다. 김의장은 “오늘 포메이션(편성)이 좋다. 삼성, 현대, LG 출신 의원과 재경부장관 출신 의원,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한 나까지 강력한 진용을 꾸려 전경련을 방문했다. 성의를 다했으니 여러분도 화답해달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김의장은 “딜(거래)은,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가 주는 만큼, 여러분도 내주어야 이 딜이 성사된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주고받는 것이 딜이지만,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뉴 딜’ 제안에서는 재계가 ‘갑’의 위치를 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김의장이 무언가 약속을 한다 한들 과연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정 협의조차 거치지 않고 공언해 어쩌자는 것이냐는 반발 기류가 확연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투자 확대를 전제로 재계에 약속한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폐지와 경제인 사면이 논란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연초부터 논란이 분분했던 사안이다. 김근태 의장이 그 뜨거운 감자를 꿀꺽 삼킨 셈이다. 언뜻 보기에 출총제는 사실상 폐지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에 김근태 의장이 단순히 그것을 앞질러 약속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대안 없는 폐지는 곤란하다는 견해를 줄곧 밝혀왔고,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제도 존폐에 관한 당론이 모아지지 않은 상황이다.

출총제는 대상 그룹의 계열사가 순자산의 25%를 넘겨서 다른 회사의 주식을 인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로 현재 자산 6조원 이상의 ‘대규모 기업 집단(재벌)’에 적용하고 있다. 이 제도는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심화를 방지하기 위해 1987년부터 시행했다. 외환위기 이후 폐지했으나 계열사 출자가 급증하고,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 2001년 재시행했다. 재계는 기업의 투자를 막는 대표적인 규제책이라며 줄곧 폐지를 주장해왔고, 학계에서도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여당 내 반발 기류도 만만치 않아

원래는 올해 말까지 시행한 뒤 평가를 거쳐 출총제 존폐를 결정하도록 로드맵(시장개혁3개년로드맵․어떤 일의 기준과 목표, 추진 일정을 글 그림으로 그린 것)이 짜여 있었으나 올해 초에 불거진 존폐 논란으로 평가 일정을 앞당겼다. 공정위는 10월까지 안을 마련한다는 계획 아래 당국과 시민단체, 재계, 학계 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프로젝트 팀)를 꾸려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출총제 대안 마련에 한창 분주한 공정위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의장의 발언이 나오자마자 공정위 관계자는 “(출총제 폐지 발언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내부 논의와 당정 협의, 국회 논의 등 여러 과정이 남아있다”라고 말했다.

 
그 후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도 부드럽지만 취지가 명확한 발언을 내놓았다. 지난 8월4일 시장경제선진화 태스크포스 회의에서 인사말을 통해 “(출총제) 조건 없이 폐지하자는 것도 아니고, 절대 폐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라면서 “순환 출자 중에서도 악성 순환 출자에 따른 폐해를 시정하되, 가능하면 현재 출총제보다 기업에 부담을 적게 주는 대안을 찾고 있다”라고 말했다. 권위원장은 취임 이후 줄곧 같은 취지를 견지해왔다. 출총제가 정책 목표에 정확히 부합하는 수단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순환 출자의 폐해가 엄연한 마당에 대안 없이 폐지할 수는 없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전경련은 이에 맞서듯 ‘조건 없는 폐지’를 내걸고 있다. 지난 8월9일 전경련 강신호 회장은 “일각에서 순환 출자 규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런 대안을 도입하는 것은 출총제보다 기업 활동을 더욱 위축시킨다”라고 못을 박았다. 공정위가 대안을 확정한 상태가 아닌데도,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이다.

당내 반발 기류를 헤쳐나가는 일도 쉽지 않다. 현재 구체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의원은 열린우리당 채수찬 의원이다. 채의원이 최근 순환 출자 규제 법안을 마련 중이라고 밝히고 나섰기 때문이다. 채의원은 “이미 2004년부터 출총제를 폐지하고 순환 출자를 금지하자는 주장을 펴왔으며 수차례 심포지엄을 열어 재계 의견을 충분히 듣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안 마련 중인 채수찬 의원 “그룹마다 사정 달라”

채의원이 마련한 법안의 골자는 현행 출총제는 폐지하고, 새로운 순환 출자를 금지하며, 유예 기간을 두고 기존의 순환 출자 구조를 해소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채의원은 “순환 출자는 ‘봉이 김선달식’ 지배 구조이다. 가공 자본을 만들어 적은 비용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게 하는 비정상적인 소유 구조이다. 다만 그런 제도에도 역사성과 현재성이 있기 때문에 10년이건, 20년이건 유예 기간을 두어 기업들이 자체 해소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공 자본을 활용한 손쉬운 계열사 지배를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채의원의 안은 공정위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앞길 또한 순탄하지 않다. 당 내에서 일고 있는 비판의 갈래는 두 축이다. 하나는 출총제의 상징성이 있는데 그렇게 무작정 폐지를 약속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고, 둘째는 폐지를 약속하면서 재계가 더 강력한 규제라고 반발하는 순환 출자 직접 규제 안을 마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자칫 샌드위치 신세가 되기 십상인 상황인데도 채의원은 “오랫동안 준비한 만큼 내용을 알면 동료 의원들도 수긍하고 동의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재계 반발에 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재계에서 출자총액제한제도보다 더 심한 규제라고 펄쩍 뛰지만, 내가 파악하기로는 속내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개별 그룹의 사정이 다르다. 드러내놓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순환 출자 규제가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그룹도 꽤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전경련의 반응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김근태 의장의 발언을 곰곰이 되짚어보아도 재계를 ‘갈라치기’하려는 셈법이 읽힌다. 그는 “한국에 ‘반(反)기업’ 정서가 있다고 얘기하곤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 구태에 젖어 있는 기업인을 향한 ‘반(反)기업’인 정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업의 활동에 장애가 되는 걸림돌을 제거할 터이니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달라”고 주문했다. 이는 일부 그룹에서 두드러진 후진적인 소유․지배 구조와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를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논의 환경이다. 김근태 의장이 출총제 폐지를 공적으로 언급한 것을 두고 당 내부에서조차 내용과 모양새가 성급했다는 비판이 터져나오고 있다. 채의원을 향한 비판의 방향이 제각각이라는 점도 험로를 예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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