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언론의 고급지 '세련된 탄생' 가능할까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9.0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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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곧 창간…한겨레도 ‘변신’ 모색
 
한국 언론은 고급지(권위지) 시장과 대중지 시장이 분화되어 있지 않다. 그동안 몇몇 언론에서 고급지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는 했지만 ‘구두선’에 그쳐왔다. 한국의 신문 시장은 영국의 언론 시장과 다르다.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더 타임스·더 가디언·더 인디펜던트 등 영국의 4대 고급지는 구독자 가운데 경영·행정·전문직 종사자 비율이 58%에서 62%에 이른다. 이 계층이 전체 성인 인구 가운데 24% 정도를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이들 고급지가, 발행 부수가 많은 대중지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도 일부 진보 언론을 중심으로 ‘고급지’를 탄생시켜보려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오는 9월15일 창간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과 한겨레가 그 선두에 서 있다. 처지와 상황 그리고 방향은 달랐지만 두 언론의 화두는 ‘고급지’로 모아졌다. 진보 언론의 고급지 전략과 이를 둘러싼 고민은 무엇일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9월 중순 창간

지난해 5월, 프랑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이냐시오 라모네가 내한했다. 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에 비판적인 대표적 지식인 논객으로,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원회’ 초청을 받아 한국을 찾은 것이다. 박승흡 당시 매일노동뉴스 대표가 이냐시오 라모네를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박대표는 이냐시오 라모네에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을 내고 싶다”라고 제안했다. 그로부터 다섯 달 후에 이냐시오 라모네로부터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회신이 도착했다. 이냐시오 라모네가 스크린쿼터 운동 등 한국의 사회·문화 운동에 강한 호감과 연대의식을 갖고 있던 것이 한국판 발행을 수용하게 된 바탕이 되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국제 문제를 다루는 월간지로서 세계적 권위지로 손꼽힌다. 1945년 외교 안보를 중심축으로 국제적 이슈와 쟁점을 심층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르몽드> 자매지로 창간되었다. 노엄 촘스키·이매뉴얼 월러스틴·피에르 부르디외 등 세계적 석학들이 필진으로 참여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세계화에 대한 대안적 사고와 관점을 균형 있게 유지하면서 미국적 지배 담론의 비판적 시각을 견지해왔다. 세계 56개 나라에서 22개 언어로 발행되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프랑스어 원판에서 엄선한 번역 기사 70%와 한국판 편집진이 기획한 기사 30%로 구성된다. ‘한국발 기사’는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을 둘러싼 이슈 및 쟁점을 심층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박순성 교수(동국대 북한학)가 편집위원장을 맡았고,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이상빈 교수(한국외대 불어과), 이희옥 교수(한신대 중국지역학) 등 교수·언론인·시민운동가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매일노동뉴스 대표를 역임했던 박승흡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발행인이 이 월간지를 창간한 것은 그동안 진보 진영이 제기해온 의제에 대해 문제점을 느껴서다. 박승흡 발행인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노동운동이 조합운동 울타리에 갇혀 더 이상 사회적 과제나 의제를 확장시키지 못했고, 진보적 지식인들도 새로운 대안이나 실천을 위한 시각을 보여주지 못했다”라고 진단한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이 새로운 돌파구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종의 외부 충격 요법처럼. 여기에 현상과 사건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를 성찰하게 만드는 권위 있는 매체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은 주요 독자층을 전문직과 지식인층 등 오피니언 리더들로 설정하고 있다. 판형도 국내 최초로 베를리너 판형으로 했다. 기존 신문 대판과 타블로이드의 중간 크기로 프랑스의 <르몽드>나 <가디언> 같은 권위지가 채택하고 있는 판형이다.

관건은 지식인과 전문가 그룹이 여태껏 한국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진중한 매체를 과연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30%를 차지하는 ‘국내발 기사’를, 50년 동안 명성을 쌓아온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 어떤 필자를 선정할지도 편집진의 고민 가운데 하나다. 가격도 변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의 가격은, 박발행인 표현대로라면 “대학생이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한 잔과 케이크 하나를 사먹을 수 있는 가격인” 7천원이다.

한겨레, 진보적 대중지에서 고급지로…

최근 한겨레에서는 이른바 ‘업마켓(Up-Market)’ 전략안을 경영진과 편집국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다. 전문직과 화이트칼라층에게 소구하는 ‘고급지’ 전략을 한겨레에 도입하겠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전략기획실을 중심으로 각종 자료 조사를 해 신문 혁신과 경영개선 방안을 연구해왔는데, 그 1차 결과물로 고급지 전략이 도출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 한겨레는 지난 8월 하순부터 편집국·광고국·판매국을 상대로 사내 설명회를 잇달아 열었다.

한겨레는 1988년 창간 직후부터 그급지로 갈 것이냐 대중지로 갈 것이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 왔다. 10주년 무렵부터 한겨레는 ‘진보적 대중지’로 자기 노선을 정립했다. 진보성을 살리되 대중성을 강화해 시장에서 위상을 높인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고급지 논의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언론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을 창간할 때만 해도 ‘진보 언론은 한겨레, 한겨레 하면 진보 언론’이라는 독자적 포지셔닝이 가능했지만, 인터넷 매체가 등장하면서 한겨레는 여러 진보 언론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런가 하면 다른 신문들이 ‘젊음·변화’ 등으로 진보 이미지를 구축하는 사이에 한겨레가 오히려 이들을 닮아가면서 차별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도 있다(임영호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진보적 대중지’ 전략이 한국 신문 시장에서 적절한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대중지 전략은 기본적으로 시장을 선점한 거대 자본에 유리하다. 물적 투입에 한계가 있는 후발 주자로서는 고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신문 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되면서 자본이 취약한 한겨레의 경영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내부 요구가 상승해왔다.

이번 고급지 전략안을 준비하면서 한겨레는 한국리서치(HRC)와 공동으로 독자 조사 및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실시했다.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겨레는 화이트칼라 독자층이 다른 신문에 비해 많았다. 중앙 일간지의 경우 전체 독자층 가운데 화이트칼라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28.3%인 데 비해, 한겨레 독자 가운데 화이트칼라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42.3%에 달했다. 주부 독자층이 약했지만, 사무직·전문직 비율은 다른 신문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신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급지 전략을 시도하기에 유리한 조건 가운데 하나다. 독자들의 기사 열독률도 단순한 사실 보도 기사보다는 사건의 의미와 이후 전망을 짚어주는 ‘Why and Next’형 기사가 더 높았다.

특이한 점은 진보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였다. ‘어떤 신문이 진보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한겨레>중앙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 순이었다. 한겨레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겨레 독자 가운데 스스로를 진보라고 여기는 독자는 58%였는데, 한겨레를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독자는 79%였다. 중앙일보의 경우 스스로를 진보라고 대답한 독자는 47%였는데, 중앙일보를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독자는 27%였다. 결국 중앙일보는 ‘스스로를 진보’라고 여기면서도 진보라는 느낌이 약한 중앙일보를 구독하는 층(20%)이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전략기획실은 이 조사를 바탕으로 중앙일보를 ‘시장에서의 경쟁자’로 설정했다.

 
사내 설명회에서는 실제 한겨레 기사에 대한 분석도 발표되었다. 가령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처럼 찬반이 엇갈리는 쟁점을 다룬 기사에서 FTA에 찬성하는 취재원의 숫자와 반대하는 취재원의 숫자가 어떠했는지, 기사의 제목은 어떠했는지 꼼꼼히 따졌다. 일방적 주장의 설득 효과보다 중대한 반대 주장을 제시하고, 이에 대해 논박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설명과 함께. 기사를 쓰는 데 ‘불편부당’ 원칙을 강화하자는 취지였다.

우수 인력 확보 등 치밀한 준비와 전략 필요

한겨레가 ‘고급지’ 전략의 제1 키워드로 잡은 것이 ‘신뢰’이다. 그동안 한겨레가 여러 조사에서 다른 신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이참에 이같은 특·장점을 살려 25~45세 화이트칼라층에 ‘신뢰, 불편부당, 객관적인 신문’으로 확실히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겨레는 익명 취재원 배제 원칙, 출처 명시, 적극적 정정보도 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매우 구체적인 취재 보도 준칙과 윤리 규범안을 준비하고 있다. 또 보도와 디자인의 질을 높이기 위해 편집국을 확대 개편하고, 새로운 마케팅 방법에 맞도록 판매국·광고국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단 한겨레가 고급지 전략을 채택하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업마켓 전략을 먼저 제안한 회사측은 편집국 기자들과 토론을 거쳐 공감대를 형성해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편집국 내부에서는 ‘고급화 전략이 광고 단가를 높이는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닌가’ ‘자칫 한겨레만의 진보적인 목소리를 희석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편집국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에서도 ‘논조 변화’를 걱정하는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지난 8월30일자 칼럼에서,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인이 “(몰상식한 사회에서) 신뢰받는 언론의 조건은 ‘진실과 불편부당의 결합’이 아니라, ‘진실과 올바른 철학의 결합’에 비롯될 것이다. 요컨대, 내공의 깊이와 진정성 그리고 치열성에 있다”라고 지적한 것도 ‘새로운 고급지 전략’을 걱정하는 목소리와 맞닿아 있다. 이를 의식한 듯 오귀환 편집국장은 고급지 전략과 관련해 “외부에 공표할 만한 단계가 아니다. 브레인스토밍(구성원들이 자유 발언을 하며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방법) 단계다”라고 말했다.

고급지 전략이 지면에서 어떻게 구체화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김창룡 교수(인제대학교 언론정치학부)는 “한겨레가 고급지 논의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환영한다”라면서도 몇 가지를 지적했다. “고급지를 만들려면 우수 인력 확보, 독자층 분석, 광고 판매 전략에 대한 치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편집과 아이템 선정 때 가이드라인에 합의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다이애나 빈이 사망했을 때 대중지는 숨겨진 애인과 전화 통화한 내용을 전면에 보도했지만, 고급지는 이를 한 줄도 싣지 않았다. 한겨레는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경우에 이를 보도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임영호 교수도 “고급지가 되려면 기자 인력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심층 분석 기사를 늘리는 지면 전략이 우선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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