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살림 고쳐주는 '가계 주치의'가 몰려온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6.09.0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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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 설계사’ 통한 자산 관리 각광…중산·서민층까지 확산
 
개그맨 남희석이 의뢰인의 집에 들이닥친다. 의뢰인은 남희석과 동행한 방송사 카메라 앞에 부엌 살림이며 안방·거실·베란다 살림을 모두 공개한다. 가지고 있는 통장과 보험 증권, 부채 내역까지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네 가계를 살리기 위한 근본적인 처방전을 받기 위해서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SBS <체인지업! 가계부>의 한 장면이다. 방송에서뿐만이 아니다. 요즘 들어 재정 전문가에게 자기네 살림살이를 점검·보수받는 일반 가정이 늘고 있다. 이른바 재무 설계가 대중화·보편화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 업계에서는, 지난해 경제계 최대 화두가 적립식 펀드였다면 올해는 재무 설계가 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재무 설계는 부유층의 전유물인 양 여겨져왔다. 시중 은행이 운영하는 PB(프라이빗 뱅킹) 센터나 보험사가 운영 중인 FP(파이낸셜 플래닝) 센터는 일차적으로 금융 자산이 10억원 이상인 VIP 고객을 유치·관리하려는 차원에서 설치되었다. 최근 들어 마케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산 1억원대 고객으로까지 재무 설계 서비스를 확대한 은행·보험사가 늘고 있다고는 하나 중산층·서민에게는 이마저도 ‘그림의 떡’이기 일쑤였다(삼성금융연구소가 지난해 전국 2천 가구를 상대로 가계 금융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구당 평균 금융 자산은 5천9백77만원이었다).

개인 자산 관리 전문회사인 TNV어드바이저 백정선 대표는 “솔직히 부자들은 자산 관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금융 회사에서 알아서 다 해주니까. 그러나 연봉이 1억원 이하인 중산층·서민은 열심히 발품을 팔아도 자신에게 꼭 맞는 재무 정보를 얻거나 자산 관리법을 상담받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산층·서민을 파고든 재무 설계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재무 설계 서비스를 표방한 업체는 TNV어드바이저, 에셋마스터, 케이리치, 팸코, 포도에셋 등 10여 개에 이른다. 이들 업체는 연소득 3천만~8천만원대인 중산층·서민을 주 고객층으로 삼고 있다.

 
지난 8월31일 재무 상담을 받기 위해 월차를 내고 TNV어드바이저를 찾았다는 김 아무개씨(35)는 스스로를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고 평했다. 김씨 아내도 은행원인 만큼 재테크에 밝은 편이었다. 한 달 평균 저축액이 3백만원 정도다. 신혼 초에 장인 도움으로 산 아파트 값이 1.5배 이상 올라 부동산 투자 면에서도 그런 대로 성공한 편인 김씨가 이 회사를 찾은 애초 목적은, 본인의 재테크 설계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를 점검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담당 FP(파이낸셜 플래너)가 던진 첫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현재 직업을 몇 살까지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인생 주기표’에 따라 저축·투자 계획 등 세워

재무 설계에서 무엇보다 중시되는 것이 이같은 인생 주기표이다. 재무 설계는 크게 정태적 설계와 동태적 설계 두 가지로 나뉜다. 정태적 설계는 주로 절세 부분을 강조하는 것으로 고액 자산가에게 적합하다. 동태적 재무 설계는 수입과 지출이 한정된 상황에서 이를 일치시키도록 시뮬레이션하는 것으로 봉급 생활자나 소규모 자영업자에게 적합하다. 그런데 동태적 재무 설계를 위한 기초 작업이 바로 인생 주기표를 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무 설계는 재테크와는 기본 개념이 다르다. 이기수 포도에셋 서울지점장에 따르면 재테크는 “3천만원이 있는데, 이를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것이다. 반면 재무 설계는 “3천만원이 있는데 내년에 아들 장가 보낼 때 쓰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어떤 상품에 묻어두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묻는 것이다. 곧 수익률을 우선시하며 상품의 이점을 따지는 것이 재테크요, 가정의 장·단기 재무 목표를 세워 이에 걸맞은 자산 관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재무 설계이다.

실제로 재무 설계가 각광을 받게 된 이면에는, 재테크 광풍에 따른 후유증이 자리하고 있다. 이기수 지점장은, ‘10억 만들기’류의 투기식 재테크가 대다수 서민을 소외시켰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5%가 돈을 벌면 95%는 돈을 잃게 되어 있는 것이 투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려면 재테크를 버리라”는 역설이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재테크에 몰두하기보다는 인생 주기별로 필요한 주택 자금·학자금·노후 자금 따위를 마련하기 위해 언제 어떻게 돈을 모아야 할지 실현 가능한 재무 계획을 세우는 것이 제대로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이지점장은 말했다.

 
재무 설계가 주목되는 또 다른 배경에는 급변한 사회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 또한 저금리·고령화 기조가 본격화한 1990년 들어 펀드 투자 및 자산 관리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TNV 김의수 수석팀장은 “영화 <괴물>에서마냥 아무도 나와 우리 가족을 지켜주거나 도와주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라고 말했다. 닥쳐온 저금리·고령화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저축보다 투자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욕망지수 조절해야 안정된 자산 관리 가능”

그러나 투자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은행·보험사 직원도 날마다 새롭게 쏟아지는 금융 상품을 이해하기가 벅찬 판이다. 따라서 일반인이라면 더더욱 장기·분산·간접 투자라는 투자의 3원칙을 지켜야 할 텐데, 이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재무 설계라고 케이리치 김정기 FP는 말했다.

인터넷 재테크 사이트 인기 강사이기도 한 김씨에 따르면, 개인이 재무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요즘은 재테크 열풍이 불면서 대학생 중에도 주식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주가가 2배로 뛰어올랐다 하더라도 한순간 기분은 좋겠지만 인생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김씨는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는 데 진력해야 할 기간에 젊은이들이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쏟아붓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투자 수익률을 따지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두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인생 목표와 재무 목표가 세워지고 나면 살림살이를 조정하는 일은 훨씬 쉬워진다. 보통은 자기도 모르게 줄줄 새는 돈을 잡는 데서, 다시 말해 지출 관리를 하는 데서부터 개인 자산 관리가 시작된다.

 
재무 설계를 받아본 일반인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6개월 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재무 설계사로부터 상담을 받았다는 김지원씨(38)는 “첫 만남 이후 불쾌해서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자기 집 살림살이를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다는 생각이 들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재무 설계사와 신뢰 관계가 잘 형성된 이들은 “내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라며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는 만기 적금을 타거나 이사를 가는 등 재무적 변동 상황이 생길 때마다 이들 ‘재무 주치의’를 수시로 호출하는 이도 상당수였다.

“돈 걱정을 하면서 사는 것은 군자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는 지방 대학 교수 이 아무개씨는 우연한 기회에 재무 상담을 받은 뒤 자신이 ‘미래는 없고 현재만 있는’ 무대책의 삶을 살아왔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올해 일곱 살인 아이의 영어 공부를 막연히 고민해왔던 주부 김 아무개씨는, 상담 이후 초등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친 뒤 아이를 어학 연수 보낸다는 구체적 목표를 세우고 이에 맞게 적금·펀드 운용 계획을 다시 짰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과 재무 설계사가 가장 많이 충돌하는 지점이 교육비와 주거비라는 사실이다. 한 재무 설계사는 “현재 자녀를 위해 쓰는 사교육비를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당신 말년이 비참해진다고 솔직히 말하고 싶지만, 이에 완강히 저항하는 부모들이 많아 에둘러 표현하곤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돈의 문제이기에 앞서 가치관과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설득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집 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김정기 FP는 요즘 고객들을 만나면 “투자 아닌 주거가 목적이라면 집을 사지 말라”고 충고하고 다닌다. 무리해서 집을 사게 되면 집 살 때 빌린 대출 비용을 갚는 데 따른 부담은 물론이요, 국민연금·의료보험비, 취득세·양도세 등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세금 부담 또한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래 보았자 고객들은 웬만해서는 ‘내 집’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신념 내지 고집을 꺾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재무 설계를 통해 가계를 안정시키고 인생의 행복을 얻고 싶은 사람이라면, 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지수’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백정선 TNV 대표는 말했다. 자기를 다스려야 부자되는 길도 열린다는 일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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