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특명 “김정일 속내를 알아내라”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09.1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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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중 기간 중국에 ‘북한 6자회담 복귀 전제 조건 탐색’ 등 막후 역할 요청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의 방중 내막이 밝혀졌다. ‘유엔 결의에 따른 대북 제재 독려’라는 것은 표면상의 이유일 뿐이다. 실제로는 미사일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미국측 안을 중국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제시하고, 그게 아닐 경우 김위원장의 안을 확인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을 것이다. 그가 베이징에서의 공식 업무가 끝났음에도 지방의 총영사관 방문을 핑계로, 나흘간이나 더 중국에 머물렀던 이유도 바로, 김위원장의 답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힐 차관보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김위원장의 방중이나 후진타오 주석의 전격 방북 등 연쇄적인 정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과연 힐 차관보와 중국 외교부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간 것인가. 베이징 정가 소식에 밝은 정보 소식통의 전언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 대략 이렇다.  힐 차관보는 9월5일의 추이톈카이(崔天凱) 및 허야페이(何亞非) 외교부부장 조리, 그리고 6일의 우다웨이 6자회담 수석대표 등 중국 외교 수뇌부와의 대화에서 그동안 속에 담아왔던 많은 얘기를 꺼내놨다고 한다.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중국이 보인 태도에 대한 불만에서부터, 강경파의 층층시하에 둘러싸인 협상파 수장으로서의 고뇌,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듣고 싶은 내용, 그리고 이와 관련한 중국의 적극적 역할 등에 대한 얘기들이다.

우선,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이후 중국이 과연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냐에 그는 집중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미사일 발사 후인 7월10일 중국측이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다웨이(武大偉) 6자회담 수석대표와 후이량위(回良玉) 부총리를 평양에 보내는 쇼를 한 게 아니냐, 또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발사 통고를 받아놓고 일부러 방치한 게 아니냐는 등, 워싱턴에서 제기돼온 여러 의혹과 불만을 집중적으로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워싱턴에서는 이 문제의 해법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우니 중국이 적극 나서달라며 ‘중국 역할론’을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정보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과거의 중국 역할론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매우 구체적으로 주문했다”라고 밝혔다. 즉 ‘김정일 위원장을 베이징에 부르거나 아니면 중국에서 고위급이 평양에 가거나’ 해서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해달라’는 것이었다. 힐 차관보가 얘기한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은 대체로 두 가지 내용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하나는 ‘미국이 무엇을 어떻게 약속하면 김위원장이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는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만약 그 경우 북한 내부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우선 앞의 얘기부터 해보자. 현재 미국(또는 국무부)의 고민은 김위원장이 미국이 어떤 말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한다. 현안인 ‘대북 금융 제재 해제와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으로서도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면서 북에 약속을 하자면 뭔가 ‘옵션’을 걸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진의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북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 미국 국무부는 베이징 외의 다른 지역에서 비공개 6자회담을 열자, 또는 6자에 복귀하면 ‘신물이 나도록 만나주겠다’ 등 여러 방안을 제시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지금은 더 이상의 시행착오가 용납되지 않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11월 중간선거 전에 있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어떤 식으로 옵션을 걸면, 김위원장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있는지 답을 달라는 것이 첫 번째 주문 사항이다.

두 번째 이야기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김위원장이 과연 주변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는가’하는 것인데, 이는 현재 워싱턴의 핵심부에서 실제 제기되고 있는 우려 사항이라고 한다. 국내에서도 이미 그런 주장이 나온 바 있지만, 미사일 발사를 주도한 게 과연 김위원장이냐, 아니면 군부이냐. 만약 군부라면 김위원장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겠느냐, 대체로 이런 것이다. 문제는 미국 국무부가 대북 직법 채널이 없어, 이런 의문에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점에대해서도 중국이 북과 접촉해 답을 가져와달라는 게 바로 힐 차관보의 요지였다는 것이다.

힐 차관보가 중국 외교부에 전한 메시지는 <시사저널>이 독자 취재해 확보한 내용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9월6일자 SBS가 유일하게 비슷한 맥락의 보도를 했다. 즉 힐 차관보가 이번 순방길에 북에 한 걸음 더 진전된 양보안을 제시했다는 것인데, ‘북이 6자회담에 복귀할 날자만 제시하면 미국은 회담 전에 북한과 따로 만나 대북 금융 제재 문제를 협의할 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SBS는 이 내용을 정부 당국자로부터 들었다며 ‘단독 보도’임을 강조했다. 이 내용과  <시사저널>이 독자 취재한 내용을 합쳐보면, 힐의 방중 메시지가 전체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힐 차관보는 우선 미국측 안으로서 SBS 보도 내용을 제시했고, 김위원장이 이 내용도 못 믿겠다면 직접 자신의 안을 만들어달라는 매우 신축적인 협상 의지를 전한 것이다. 그러고는 김위원장의 답이 올 때까지 중국에서 체류하며 기다릴 명분으로 상하이 광저우 등의 미국 총영사관 방문 일정을 잡아놓고 여행길을 떠났던 것이다.  

 
중국은 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 힐 차관보에 대한 중국 외교부의 정서는 그동안 매우 악화되어 왔다. 지난 2004년 그가 주한대사에서 6자회담 수석대표 및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로 발탁되었을 때만 해도, 그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했던 약속 중 별로 지킨 것이 없자 최근 들어서는 ‘믿을 수 없는 인물’로 격하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힐의 잘못인지, 아니면 내부 통제가 안 되는 부시 행정부의 문제인지 가려봐야 하겠지만, 힐의 요청에 중국 외교부의 대응은 바로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 즉 ‘부르거나, 가거나’ 딱 집어서 요구한 데 대해, ‘둘 다 고려해보겠다’며 딱 부러진 답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9월7일 친강 외교부 대변인이 바로 이틀 전 김정일 위워장 방중에 대해 현재로서는 예정이 없다고 했다가 이를 뒤집는 발언을 한 데서도 보듯이, 느긋하게만 있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뿐 아니라, 그림이 된다면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평양으로 갈 수도 있지 않느냐는 얘기까지 하고 있다. 순서상 볼 때, 김위원장이 지난 1월 중국을 방문했으니, 후주석이 가는 것도 맞다는 것이다. 후주석 방북 가능성은 힐 차관보를 통해 미국의 협상 메시지가 전달된 이후 나온 얘기다.

힐 차관보가 제기한 두 가지 의문

그동안은 중국의 고위급이 가거나 아니면 북에서 오거나 하는 막연한 수준이었다. 우선 순서상으로 보면 이렇다. 중국측이 먼저, 지난 8월 중순 최소한 정치국 상무위원급의 대표단을 8월 말쯤 평양에 보내겠다고 의사를 타진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8월 말 재외공관장 회의 등 일련의 행사가 예정된 때문인지, 이를 9월로 연기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그러고 나서 8월 말 공관장 회의 뒤 김위원장 방중 얘기가 급박하게 전개되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보면 김위원장의 방중이라기보다는 장성택이나 박재경 등 측근 인사의 비밀 방중이 먼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순서상으로 9월8일 평양 주재 중국 대사로 취임하는 류사오밍 대사 편에 중국측이 정식 초청장을 보내고, 이를 토대로 9·9절 이후 9월20일경 사이에 중국을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동안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힐 차관보를 통해 미국의 협상 의지가 확인되면서 판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신 동북공정으로 한국의 여론이 비등한 시점임을 고려했을 때 후진타오 주석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 방북함으로써 대외적으로도 한 건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는 얘기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 상황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좀더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사일 정국이 하반기에 접어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보이는 세계’의 논리로만 보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전개이다. 무엇이 이같은 변화를 추동했나.

그동안 ‘워싱턴발 뉴스’의 관점으로만 보자면, 북은 이미 미국의 금융 제재로 인해 철저히 고립되었고, 또 9월 말부터 시작될 경제 제재까지 앞두고 있다. 손들고 나오거나 아니면 무너지거나 둘 중 하나밖에 택할 게 없어 보였다.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변화를 추동하는 힘은 워싱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미사일 발사 후 약 40일간 종적을 감췄던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8월15일을 전후해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그가 사라진 것은 신변의 위협을 느낄 만큼 당시가 ‘군사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군사적 상황이 지나고, 외교적 상황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가 모습을 나타낸 지 이틀쯤 뒤인 8월17일 미국 ABC 방송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지하동굴 근처에서 핵 실험 징후가 있다고 보도했다. 이 핵 실험 움직임은 과연 누구를 겨냥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미국을 떠올리지만, 미국은 이미 북한이 핵 실험을 넘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수준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 핵 실험은 명분상으로는 문제가 되나, 실제적인 문제는 아니다.

반면 중국의 경우는 어떤가. 북의 핵 실험 지하동굴은 대부분 북·중 국경 지역에 위치해 있다. 중국으로서는 방사능 낙진 등 실제적 피해가 염려된다. 당연히 미사일 발사 후 북·중 양국 간 팽팽하게 형성된 기묘한 균형 상태가 깨지고, 중국 내에서 대북 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즉 ‘8월 말 중국 지도부 내에서 대북 관계를 둘러싼 격론이 벌어졌고, 일부 반대에도 북·중 관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위원장이 꺼내든 핵 실험 카드가 기묘하게도 중국을 압박해, 중국을 대북 제재 반대 및 북·중 관계 회복 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고, 이것이 거꾸로 미국을 움직이게 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북한-이란 커넥션의 의미  : 북·중 관계는 그나마 겉으로 상당 부분 드러난 셈이다. 반면 북한과 이란의 커넥션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 미국의 정책 당국자들의 골머리를 썩게 하는 요소인 것으로 보인다. 미사일 발사 직후 힐 차관보가 이란의 고위급 참관단이 발사 현장에 있었다고 발언했다가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인 것이나, 럼스펠드 장관이 북은 남한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 대량살상무기(WMD) 확산이 더욱 위협적이라고 한 것이나, 로버트 조지프 국방부차관이 지난 6일 워싱턴 프레스 센터에서 북한과 이란의 커넥션 및 이란의 핵 무장에 우려를 표명했던 것 등등이 간헐적으로 노출된 모습이다.

미국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북한-이란 관계가 단순히 미사일 기술 이전을 넘어 핵 탑재 미사일 및 핵탄두 이전으로까지 확대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미국은 이미 7월5일의 미사일 발사로 북이 핵 탑재 능력 및 제2격 보복 능력을 과시했다고 인정한 바 있고(8월 중순 미국의 안보 전문 인터넷 주간지인 <인사이트> 보도), 이란의 고위급 참관단이 보고자 했던 것 또한 그 점이었다고 본다면, 양측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지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이란의 관점에서 보면 그림은 한결 뚜렷해진다. 이란은 어떤 면에서 신정국가이다.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세이다. 이들은 지난 2003년 ‘핵을 가지지 않은’ 이라크가 어떻게 당했는가를 똑똑히 봤다. 2004년 이후 고농축 우라늄 개발 문제를 본격화하면서 핵 개발을 이슈화하고,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라는 ‘무데뽀 젊은이’를 대통령에 앉혀놓고 핵 개발을 밀어붙이고는 있지만, 지금의 기술 수준으로는 ‘5년 이후’에나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

마음이 급한데 5년 이후라니.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이란이 미국 혹은 유럽과 벌이고 있는 핵 협상은 코미디라는 느낌마저 준다. 이란식의  ‘만천과해(瞞天過海; 하늘을 숨기고 바다를 건너다)’, 즉 기만술이며, 실제로는 ‘레디 메이드’된 핵탄두와 미사일을 세트로 구입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서 이란과 동병상련하며 공명해줄 나라는 ‘동방의 작은 나라’ 북한밖에 없다.

최근 북한-이란 커넥션은 ‘북한이 최근 다시 꺼내든 미사일의 실제 발사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 건너편 호르무즈 해협 인근 지역’, 즉 이란이 될 것이라는 얘기에서부터, ‘테헤란 주재 북한 대사가 곧 바뀌는데, 그 일을 계기로 북한-이란 관계가 뉴 스테이지로 넘어갈 것’이라는 얘기까지 다양하다.

이란이 핵탄두와 미사일로 무장하면 어떻게 될까.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성서에 표현되어 있는 아마겟돈(이스라엘에 적의 출현으로 지구 종말을 향한 마지막 전쟁이 벌어지는 것)의 상황을 연상하면 된다. 그러나 이 상황을 막을 만한 방책이 뾰족하지 않다는 데 바로 부시 행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고민이 있다. 사실은 해답이 없는 게 아니라, 아주 쉽고도 간단한 해답이 있다. 지난 8월26일 북한 외무성 담화에서 북측이, ‘9·19 공동성명이 북한에도 이익이 되며, 6자회담을 더하고 싶다’고 밝혔듯, 그 희망이 이뤄지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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