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검프도 잘살 수 있는 나라
  • 김상익 편집위원 ()
  • 승인 2006.09.11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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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무려 1백40분 동안 쉬지 않고 낄낄거리며 본 영화가 톰 행크스 주연의 <포레스트 검프>였다. 아이큐 75인 저능아의 입을 빌려 미국 현대사를 무차별로 야유한 그 영화는 많은 비평가로부터 별 네 개의 최고 평점을 받고 아카데미 상도 여섯 개 부문이나 휩쓸었다. 나는 그 풍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미국에서 사는 동안 그 사회에서는 포레스트 검프 같은 저능아에게도 생활의 기회(생존 기회가 아니다)가 주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떤 면에서 미국은 매뉴얼의 사회이다. 별별 것이 다 규칙으로 정해져 있다. 언젠가 워싱턴 주립대학(UW)의 유학생이 자신의 도서관 아르바이트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폐관 후 도서관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 매뉴얼이 어느 정도로 철저했느냐 하면, 이를테면 몇 시 몇 분에 몇 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오른쪽 90도 각도로 몇 초 동안 살핀 다음 몇 번째 통로를 이용해 지정된 구역을 돌아보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라는 식이었단다. 물론 그 시간에 다른 대원들 역시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각기 다른 장소와 다른 각도를 감시함으로써 물샐 틈 없는 야간 경비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사회 각 방면이 이런 따위의 매뉴얼로 움직인다면 아이큐 75짜리도 얼마든지 ‘정상적으로’ 일상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원 봉사 이야기를 꺼내려다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아이들이 한국에 있을 때 가장 애먹었던 것이 자원 봉사 점수 따기였다. 한마디로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만만하게 찾아가는 곳이 유치원이었다(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의 핸디캡이 컸다). 나는 경찰서나 동사무소 같은 관공서를 찾아가보라고 점잖게 권유했지만 그것은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당장 처리할 일이 태산 같은데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인 학생들을 얼씨구나 하고 받아줄 공무원이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대물림 거듭하며 진화한 자원 봉사 매뉴얼

미국에 가서도 자원 봉사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교포 2세나 3세 어린이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우리 아이들도 한국어 강습으로 많은 시간을 얻었지만 처음에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오랫동안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며 정보를 수집했다. 어느 모임에선가 병원 자원 봉사가 가장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튿날 당장 동네 근처 종합병원으로 달려갔다. 접수 카운터에 지원 서류를 제출하자 결원이 생기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두 달쯤 지나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종합병원 자원 봉사라고 해보아야 별것은 아니었다. 입원 환자에게 위문편지나 꽃을 배달하는 정도였다. 하는 일은 자질구레한 심부름뿐이었지만, 요일별로 팀이 구성되어 고참 봉사자가 팀장으로서 회의를 이끌고 업무를 분담하는 등 자원 봉사 조직은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운영되었다. 미국의 자원 봉사 매뉴얼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대물림을 거듭하며 진화했다. 언젠가 아이들은 병원에서 머리가 희끗한 노인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의 유니폼에는 ‘자원봉사 3천 시간’이라는 문구가 자랑스럽게 아로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 여름방학에 아이들은 4년 만에 귀국했다. 두 아이 모두 4주일 동안 각기 다른 곳에서 인턴 사원(자원 봉사)으로 일했다. 그런데 첫 출근하는 날 한 기관의 책임자가 들려준 말은 이러했다. “우리는 아직 체계적인 인턴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못했고, 각자 할 일이 바빠 크게 신경을 써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불편하더라도 각자가 알아서 일을 배워야 합니다.”

오래 전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신입 사원 재교육에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면서 대학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이냐고 분통을 터뜨린 적이 있다. 삼성·현대가 아니라도 재벌급 기업이라면 얼마든지 자체 교육 시스템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만한 역량을 가진 조직이 과연 우리나라 전체에서 몇 퍼센트나 될지 의문이다. 자원봉사자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매뉴얼이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성숙을 드러내는 서글픈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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