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으로 뻗은 미국 ‘테러 전쟁’
  • 이지은(자유기고가) ()
  • 승인 2006.09.1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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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모슬렘 거주지 호로 섬 맹공…“미군도 함께 참여” 증언 나와
 
필리핀 남부의 호로(Jolo)섬에서는 몇 개월째 군사 공격으로 인한 참극이 끝나지 않고 있다. 필리핀 정부군은 헬리콥터를 이용해 섬의 산악지대에 무차별적인 로켓 공격을 퍼붓고 있으며 지상군으로 투입된 해군들은 섬 주변 곳곳에서 반군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 주민들은 마치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위압적 분위기 속에서 가까스로 숨통만 트고 있는 상태이다. 지난 9월4일 로이터 통신은 정부군은 호로 섬에 군 병력 5천명이 추가 투입되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날 세 시간 교전에서 정부군 여섯 명과 이에 대항하는 모슬렘 무장 단체 게릴라 여덟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호로는 필리핀 남부 술루 제도에 속하는 섬으로 원주민들인 모슬렘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모슬렘 분리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온 곳이다. 이번 공격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시기를 틈타 필리핀 남부 지대에서 무장 저항운동을 펼치고 있는 모슬렘들에 대해 ‘조용한 초토화’를 감행한 것으로, 미국 군사 고문단의 지시와 확고한 군사 기술을 배경으로 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이곳 호로 섬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아부 사야프라는 무장 저항 단체가 알 카에다와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호로 섬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부 사야프 단체를 괴멸시킨다는 목표로 군사 작전을 몇 개월째 주도해오고 있다. 또한 아부 사야프 그룹 지도자인 장잘라니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에 대해서는 포획 현상금이 최대 5백만 달러까지 걸려 있다.

모슬렘 무장 단체 아부 사야프 겨냥

부시 미국 대통령은 9·11 이후 대테러 전쟁을 선포하고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을 냉전 시대 공산주의자들과 필적할 만한 새로운 적으로 분류해, 이들을 박멸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전세계에 유포하고 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이라크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 동남아 지역에서도 합동 군사훈련을 벌이며 압박 강도를 높여가고 있지만, 이는 불특정한 모슬렘을 대상으로 지나친 공세를 퍼부어 인종 차별에 앞장서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3년 콜린 파월 미국 국무부장관은 필리핀을 방문해 아로요 대통령에게 테러리즘에 맞선 군사 원조를 늘리는 한편 정보 교류 활성화를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부시 행정부는 해마다 필리핀 정부에 7천만 달러 이상을 군사 원조 자금으로 보내고 있다. 이는 2001년 2천2백만 달러에서 세 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필리핀 아로요 정권 역시 부시 정권의 핵심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무한한 환영을 보내면서, 자국 내 테러리즘 근절을 위한 원조를 간곡히 부탁했다. 아로요 대통령으로서는 오랜 골칫거리였던 필리핀 남부 지대 모슬렘들의 정치적 저항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무력 행사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1996년 필리핀 정부는 이 지역에서 분리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대표적 조직인 모로민족해방전선(MILF)과 평화협정을 맺었었다. 하지만 이 협정은 이내 교착 상태에 빠졌고, 대신 아부 사야프와 같은 과격 무장 단체들이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지지 기반이 취약한 아로요 정권에는 큰 위협 요소로 작용했다.

한편 미국의 처지에서도 자신들의 군사 정책과 일치하면서 동시에 필리핀 내정 간섭을 합법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이점이 무엇보다도 컸기 때문에, 양측은 손쉽게 테러리즘에 맞선 군사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로요 정권, 미국과 손잡고 “눈엣가시 뽑자”

지난 2월, 필리핀에서는 콜린 파월 미국 국무부장관의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가 미국 대사관 앞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시위대는 “미 제국주의자들이 테러리스트 1위” “콜린 파월, 자신의 인종을 부정하는 배반자, 당신은 인류의 살인자”라고 외쳤다. 같은 날, 호로 섬에서도 수백 명이 반미 시위를 벌였다. 백명 정도의 섬 주민들은 연례 군사합동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미국 특공대의 철수를 요구하며 도시 중심가로 행진했다. 그들은 매년 약 5천명의 미군들이 필리핀에서 아부 사야프에 대한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시위대 중 한 명은 2005년 11월 아부 사야프 무장 단체를 공격할 때 미군들 역시 필리핀 병사들과 나란히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2001년 이후 미군은 필리핀 내에서 단순히 경제적·기술적 군사원조와 주둔을 넘어서 필리핀 내전을 배후 조종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관측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대테러리즘 이데올로기는, 위협적 테러리스트 집단 제거와는 별개로 일부 국가들에 대한 무력 개입 명분이 되고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현재 군사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는 호로 섬을 비롯한 만다나오 섬 일대는 극빈곤층이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생활수준이 낮은 지역이다. 게다가주민들은 종교적 탄압, 플랜테이션 농작으로 경제적 수탈을 겪으며 오랜 세월을 너무나 힘겹게 살아왔기 때문에 필리핀 정부에 대한 반감은 매우 강하다. 섬 주민들은 아부 사야프 단체의 민간인 납치 범죄 행적을 비난하면서도, 테러리스트 집단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미국과 필리핀 정부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아부 사야프 단체는 필리핀 정부가 만다나오 섬 일대의 낙후한 사회 기반 시설을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공공 서비스 부문에 대한 투자도 중단했다고 비판하며, 이 지역 모슬렘들의 인권 회복과 자치 권리를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섬 주민들이 그들을 테러 집단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정부의 군사 공격을 비난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일부는 과격한 그들 무장 투쟁 노선에 대해서 강자에 맞선 약자들이 취하는 어쩔 수 없는 투쟁 수단이라고까지 비호하기도 한다.

이같은 주민들의 반응에 미루어보더라도 이 지역에서의 평화는 미국과 필리핀 정부의 군사 작전을 통해서 테러리스트들을 축출하겠다는 것만으로는 실현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수행 중인 정부의 대테러정책은 오히려 살육과 파괴의 악순환만 되풀이할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매년 민다나오 섬 일대 테러리스트 퇴치에 쏟아 붓는 미국의 군사 원조 자금 수천억 달러를 주민들의 빈곤 퇴치에 쓴다면, 최소한 군사 공격 중 발생하는 무고한 인명 피해만큼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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