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연극은 전어보다 맛있다
  • 장성희(연극 평론가) ()
  • 승인 2006.09.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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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이첵-마리를 죽인 남자> <뷰티풀 선데이> 외

 
대체로 대도시 생활을 미워라 하지만 두 가지 일에서만큼은 대도시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일찍 문을 여는 커피숍에 들어앉아 익명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바라볼 수 있고 언제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연극을 보러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아니 단연코 ‘연극의 계절’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와 사십대 중년이 되도록 서울살이 곁방살이를 한 내게는 그렇다. 가을 추석 연휴 동안 도시는 텅 빈다. 명절이라야 심부름만 내 차지인 신세가 진즉 싫었던 나는 공부를 핑계 삼아 고향에 가지 않고, 모두 떠난 자취집에서, 잠실야구장 밑에 살고 있다는 마징가랑 빈 서울을 지켰다. 물론 고향에 가면 첫사랑 소년을 골목에서 마주칠 수도 있었고, 서울내기가 다 되었다는 듯 사복차림으로 “~했니, 어쨌니?” 서울 말씨로 분장하고 친구들의 기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다른 재미에 빠져 귀향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연극 보는 재미’ 때문이었다. 어느 추석 연휴, 관객 세 명을 달랑 앞에 앉혀놓고 일곱 명의 배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보여주었던 그 스산한 가을날 공연을 나는 잊지 못한다. 막상 연극 제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미국 작가 폴 진텔의 어려운 제목의 연극, ‘감마선은 달무리 얼룩진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였던가? 아라발의 그로테스크한 부조리극이었던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모두 따뜻한 둥지를 찾아가 하하 호호 하고 있을 시간에 그들은 평범한 삶의 금 밖에서, 지하 극장 안에서 지상의 삶을 걱정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 극장 바깥의 삶의 규칙들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극장 안의 시간은 무엇이었는가? 숫돌에 간 듯 그날 벼려진 나의 그 세계에 대한 낯선 감각과 일상의 질서와는 다른 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인식은 나를 그 후 문학과 연극으로 이끌었다.

 
이 가을 홀로 도시를 배회해보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서 나뭇잎처럼 쓸쓸해하다가 문득 작은 극장 입구에 서보라. 가을만큼 극장에 가기 좋은 계절은 없다. 냉방기도 난방기도 틀지 않은 고요한 극장에서 오롯이 사람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그리고 사는 일의 고통이 길러낸 진주 같은 말들을 귓바퀴 가득 모아 가장 깊은 마음의 서랍에 간직해보자. 연극만큼 우리 삶의 전면을 독서하기에 좋은 텍스트는 없다.

연극은 ‘삶의 전면’을 독서하기에 좋은 텍스트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 <보이첵-마리를 죽인 남자>, 성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아기자기하게 풀어놓는 <뷰티풀 선데이>, 퓨전 신파극이라 붙였지만 그 자학적 명명을 걷어내면 참으로 눈물겨운 러브 스토리 <보고싶습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꾼의 한판 굿 <염쟁이 유씨>, 떠들썩 세상 참살이를 보여주는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 맑고 경쾌한 바람난 여자 이야기 <그녀를 축복하다>…. 그리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러시아의 요절 시인 마야코프스키가 쓴 포복 졸도 코미디 <빈대> 등의 세계 명작들도 이 가을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에 연극을 보는 일은 전어 한 접시를 먹는 일보다도 맛있다. 그리고 그 맛은 오래 간다.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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