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이룬 ‘대학살’ 고해성사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6.09.2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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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과거사위 발표 ‘보도연맹원 처형자’ 숫자, 빙산의 일각에 불과

 
국가가 반세기 만에 국민에 대한 작은 본분 하나를 이행했다. 경찰청 과거사위원회는 9월14일 “한국전쟁 기간에 적법한 절차 없이 처형된 보도연맹원 3천5백93명을 포함해 1만7천7백16명의 민간인 학살을 확인했다”라고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어 그 학살의 근거로 쓰인 당시 내무부 치안국장의 예비검속 명령은 법적인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학살을 실행한 주체는 경찰 1천81명과 군인 5천1백57명이었으며, 개전 초기에는 경찰이, 전시 계엄 하에서는 헌병 특무대 등 군이 예비검속과 학살을 주도했다고 한다. 이번 경찰 발표는 전쟁을 빌미로 비무장 민간인을 불법 구금하고 집단 학살한 정부의 책임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보도연맹이란 한국전쟁 이전에 남로당 등 좌익 계열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사람들이나, 김구 선생의 한독당 계열 등에 가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에 봉사할 기회를 준다며 정부에서 강제로 가입시킨 조직을 말한다. <시사저널>은 1992년부터 현대사의 은폐된 비극을 추적 발굴하는 과정에서 10여 회에 걸쳐 보도연맹 집단 학살 사건의 참상을 기사화하고,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 위령을 촉구한 바 있다. 일련의 취재 결과 추정된 전국의 보도연맹원 숫자는 30만명 선이었고, 수원 이남 지방에서는 이들 대부분이 학살되었다는 단서를 포착했다.

오제도 검사가 ‘보도연맹’ 입안

보도연맹을 입안한 사람은 광복 후 사상 검사로 이름을 떨친 오제도 검사(2001년 작고)였다. 세상을 뜨기 전 오제도 변호사는 <시사저널> 취재진과 만나 보도연맹 입안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나는 사상 검사로서 좌익을 다뤄본 경험과 일제가 공산주의에 대처한 방식, 나치가 공산주의에 대처한 방식 등을 참작해 1949년 보도연맹 안을 만들었다. 이를 내무부·법무부·국방부 등 관계 기관의 동의를 얻어 실시했다. 1950년 초까지 전국적으로 30여 만명이 가입했다.”

 
이어 그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전국 각지에서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보도연맹원을 즉결 처형한 것은 이승만 정부의 큰 잘못이었다고 지적했다. 전향자 조직이어서 인민군에게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는데도 군경이 ‘후환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무차별 처형해 이후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 전쟁 참상을 더욱 키웠다는 것이다. “서울은 인민군이 워낙 빨리 밀고 들어와 보도연맹원을 즉결 처형하지 못했는데, 이들은 인공 치하에서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정부 요인과 군경 가족을 숨겨주는 등 인명 피해를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수원 남부 지방은 제주도까지 대부분 예비검속으로 학살해 나중에 보복 학살을 불렀다”라고 고 오제도씨는 말했었다.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은 대부분 1950년 7~8월 사이에 집중되었다. 수원 이남 지방의 보도연맹원들은 현지 경찰과 군부대의 교육 소집 명령을 받고 영문도 모른 채 나갔다가 학살당했다. 육지에서는 산골짜기나 계곡·강가·폐광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집단 총살당했고, 섬이나 해안 지방 곳곳에서는 배에 태워졌다가 돌을 매단 채 수장당했다.

과거사위 “피해 접수 많아 추가 조사 불가피”

결국 보도연맹 입안자 오제도씨의 증언으로 미루어보면, 이번에 경찰청 과거사위가 발표한 보도연맹원 피학살자 숫자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경찰 과거사위도 발표 과정에서 “경찰청에 입력된 전산 자료에만 의존해 실제 희생자 수와 보도연맹원 피해자는 더 많을 수 있다”라고 여지를 남겼다.

한국전쟁에서 일어난 가장 큰 민간인 집단 학살이라 할 보도연맹원 학살 후 역대 정부는 그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피해 유족들은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는커녕 연좌제에 걸려 1980년대까지 2중 피해를 당했다. 1950년 7월 경북 상주에서 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이재훈 전 부장판사는 “선친의 억울함을 신원하지도 못한 채 연좌제가 두려워 호적마저 바꿔 학업을 계속했다. 본명으로 살았다면 사법시험 응시는커녕 법관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경찰 과거사위의 보도연맹원 학살 진상 발표는 진실의 일부만 드러낸 것이어서 사건 전모에 대한 후속 진상 규명이 불가피하다. 그 작업은 10월부터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 위원장 송기인 신부)’에서 수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위 김동춘 상임위원은 “위원회에도 보도연맹원 학살 피해 접수가 많이 들어와 있어서, 경찰 과거사위 조사 결과와 기록 일체를 넘겨받아 추가 진상 규명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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