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문주의자 그들을 고대하는 이유
  • 이인식(과학문화연구소장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
  • 승인 2006.10.09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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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식의 시사과학] ‘인문학과 자연과학 경계 허무는 학자’ 늘어야 인문학 위기 탈피
 
이공계 위기에 이어 인문학 위기가 사회적 관심사로 급부상했다. 얼마 전 고려대 문과대 교수 1백17명이 우리 사회의 무차별적 시장 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문학이 존립 근거마저 위협받는 중대 기로에 서 있다고 주장하는 ‘인문학 선언문’을 발표했다. 전국 80여개 인문대 학장들도 인문학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는 ‘인문학 성명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인문학이 고사 직전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이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과 처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는데, 그 타개책의 하나로 인문학을 자연과학 및 첨단기술 분야와 연계시켜 현실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를테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인문학의 체질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은 1959년 영국 물리학자인 C.P. 스노우(1905~1980)가 ‘두 문화와 과학 혁명’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제기한 이후 줄곧 과학자들의 화두가 되었지만 이에 관심을 표명한 인문학자들은 많지 않았다.

스노우는 현대 서구 사회의 지적 활동이 인문적 문화와 과학적 문화로 양극화한 것을 우려하고 두 문화 사이의 단절을 극복하는 제3의 문화를 제안했다. 1995년 미국의 과학저술가 존 브록만은 <제3의 문화>를 펴내고 서구의 경우 우주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의에서 과학이 문학이나 철학 대신에 중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 제3의 문화를 주도하는 과학자로 소개된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구 사상계의 주도권이 인문학자들로부터 과학자들에게 옮겨지고 있다는 브록만의 주장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학제간 연구로는 인지 과학·복잡성 과학·진화심리학 등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인지과학은 사람의 마음을 연구한다. 철학·심리학·언어학·인류학·신경과학·인공지능 등 여섯 개 학문이 뇌와 마음의 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공동 연구를 한다. 복잡성 과학은 물리학·생물학·경제학·사회학·컴퓨터 과학 학자들이 복잡적응계를 연구한다. 복잡성 과학의 목표는 복잡적응계에서 질서가 자발적으로 창발하는 원리를 밝히는 데 있다. 사회생물학에 사망 선고를 내린 진화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을 진화의 산물로 전제하고 진화생물학·인지과학·인류학·신경과학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인간의 마음이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의 산물임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인문과학자들 과학자 경시도 문제

브록만은 1997년 웹사이트 포럼인 ‘엣지’(www.edge.org)를 개설하고 제3의 문화 지식인들의 토론을 주도하면서 그 결과물의 하나로 <새로운 인문주의자>(2003)를 펴냈다. 그는 문학·역사·정치학·예술 등 모든 분야가 과학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러한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지적 활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들을 전통적인 지식인과 구별하기 위해 새로운 인문주의자(new humanist)라고 불렀다. 인문학자이건 과학자이건 새로운 인문주의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서는 지식인 대접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 담긴 용어인 셈이다.

브록만의 생각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간에 학제간 연구의 출현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전통적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별개의 문제인 듯하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관심을 갖기는커녕 노골적으로 과학자들을 경시하는 풍조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2005년 국내 유수의 과학 논객들이 엮은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에서 권유한 바와 같이 과학기술을 인문학적 상상력 속에 녹여 현실적합성을 지닌 연구를 시도하는 인문학자들이 출현해서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앞장서게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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