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키아의 신화 과대 포장되었다”
  • 반이정(미술 평론가) ()
  • 승인 2006.10.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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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제대로 하지 않고 영웅화…작품 주제도 단조로워

 
그 시작은 자신의 서명처럼 되어버린 낙서, SAMO(Same Old Shit)가 말해주듯 ‘별것 아닌 것’에서 출발했으나 그 나중은 창대하고 또한 짧았다.
유명세에 비해 과대 평가받는 미술인으로 나는 바스키아를 꼽는다. 거리를 배회하는 스무 살의 낙서화가였던 그가 그러피티(낙서)라는 하위 문화를 제도 예술의 한 장르로 정착시킨 예술적 공로는 평가받아 마땅하리라. 그러나 그러피티의 전통조차 바스키아 이전부터 뉴욕 브롱크스 지역에서 하위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이 근래 들어 상위 문화의 한 주류로 급부상한 힙합이다. 그가 벼락같이 누린 전성기와 사후 평가는 분명 지나친 감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지구촌 화단으로부터 이미 천재 화가로 ‘입증된’ 거물에 대해 동아시아의 일개 비평가가 상반된 평가를 내놓은들, 작가와 기획전에 누가 되지는 않을 터이다. 도리어 평자인 나의 안목에 허물이 되는 오점이 남을지도 모를 일. 그렇지만 내 본심이 그러한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브루클린 출신의 부랑아가 이토록 신화화된 사정을 이해하기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바스키아는 신화화에 필요한 모든 채비를 기왕에 갖추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화단을 휩쓴 신표현주의 트렌드에 얼추 맞아떨어진 오일 스틱(유성 크레파스)의 중구난방식 드로잉은 뭔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던 화단의 동맥경화를 풀어준 느낌이 아니었을까? 어디 그뿐인가. 미술 교육은 고사하고 고교 중퇴라는 학력상의 결함은 역설적으로 이 패기만만한 청년의 때 이른 역량을 반증하는 것으로 비쳤을 게다. 더욱이 유색 인종으로서 20대 초반부터 승승장구한 그의 입지전은 성공을 갈망하는 ‘저주받은’ 유색 소수 인종 모두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빠질 것 없는 역할 모델 아니었을까. 외람되나 27세에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요절한 기구한 사인(死因) 역시, 흔히 천재 요절 스타의 사망 스탠더드의 전철을 고스란히 밝고 있으니. 사정이 이러하니 사후 신화화를 위한 완벽한 삶의 패턴이 달리 있겠는가?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공식을 따라, 그의 작품에 대구해보자. 그가 사망한 후 집필된 서너 편의 평문을 검토했으나 바스키아가 생전에 전념한 주제들을 반복 열거하거나 작가적 배경에 관한 객관적 기술만 있을 뿐, 반복되는 주제들이 조명받을 만한 마땅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 논리까지 찾기 어려웠다. 이는 거물 작가에 대한 모든 평문이 빠져드는 매너리즘이다.

사후 평문들, 작품 주제 제대로 조명 못해

가령 바스키아 사후 추모 작업마다 이름을 올리는 리처드 마셜(그는 바스키아의 1997년 국내 개인전뿐 아니라, 이번 전시에도 서문을 기고했다)은 바스키아의 작품 주제를 여덟 범주, 즉 자전(自傳)·흑인 영웅·만화책·해부학·낙서·인종주의·돈·죽음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요컨대 해부학이란 주제의 경우 그가 사고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유년기에 선물로 받은 헨리 그레이의 해부학 책에 몰입한 나머지, 그 기억이 장성한 후 해부학 주제로 남더라는 식의 해설이다. 혹은 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와 해부학 스케치에 영향을 받아 변주된 해부학 드로잉을 남겼다는 식이다. 이것을 과연 해설이라 할 수 있을까? 유년기의 해부학 탐독이 현재 해부학 주제의 근원이다? 이것은 동어 반복일 뿐이라서 관객은 바스키아와 해부학 주제 사이의 명료한 관계에 관해 해답을 얻지 못한다.

 
나는 오히려 해부학이 그의 주제에 반복 채택되는 까닭으로, 제도 미술교육 과정에 해부학 수업이 있는 점에서 찾고 싶다. 제도 교육의 수혜자가 아닌 바스키아에게 제도 교육은 넘어서지 못한 열패감 같은 것이리라. 누가 뭐라 해도 바스키아의 드로잉 솜씨는 형편없는 축이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설령 그것이 고의로 망친(?) 손놀림이라 할지라도. 물론 그의 유아적 드로잉은 반어적으로 화단에서 큰 환영을 받기는 하지만, 탄탄한 드로잉 훈련 없이 자수성가한 작가에게 ‘고전적 훈육 방식’은 넘어야 할 하나의 산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내게 바스키아를 읽는 키워드는 열등감이다. 그가 드로잉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반복하는 까닭도 비슷한 동기에서가 아닐까 짐작한다. 달리 말하면 거역할 수 없는 고전적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치부를 은폐하는.

바스키아를 읽는 키워드는 ‘열등감’

그가 몰입한 또 다른 주제인 흑인 영웅 역시 비슷한 추론이 가능하다. 그의 신분 상승 욕구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인종차별이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분야별 1인자가 된 흑인 선배들에 대한 고삐 풀린 오마주다. 바스키아의 캔버스로 모셔온 선배는 야구선수 헹크 아론, 권투선수 슈가 레이 로빈슨,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재즈 색소폰 찰리 파커 외에 더 있고 이들은 반복적으로 화면에 등장한다. 이에 대한 해설 역시 이들이 바스키아의 역할 모델이었다는, 실은 하나 마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이런 해설 이상을 요구해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반복 차용하던 관성처럼 그의 열등감을 달래는 길은, 도전할 수 없는 역사적 권력들을 화폭 위로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스키아 페인팅의 특징, 즉 화폭을 가득 메운 단어와 문장의 난립 역시 지리멸렬한 조형적 효과 밖의 또 다른 의문으로 옮아가야 한다.

그가 몰입했다는 여덟 주제는 단조롭다. 독해 불가한 용어와 그가 고안한 기호는 빈약한 주제의 단점을 가려주는 역할이 되었을 것이다. 전문가조차 가독하기 힘든 용어가 무차별 열거된다. 비속어는 물론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어, 거기에 이탈리아어까지 동원된다. 다중 언어로 구성된 이 ‘말 많은’ 작품은 외부의 원활한 해석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명언 중 “예술의 참뜻을 알겠다고 비평가를 찾는 사람이라면 상대를 않겠다”라는 말을 왜 했겠는가? 주제는 던져주되 해석은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그 대신 그는 스케일로 보답했다. 스케일 역시 고전적 전례를 그 자신의 스타일대로 재구성하는 재능이 있었다. 합판을 이어 붙여 만든 대형 화면은 마치 르네상스의 삼면 제단화의 전통을 떠올리게 된다. 제단화의 종교적 엄숙성을 뒤집어쓴 그의 대형 낙서화 앞에서 관객은 숙연해진다.

남은 자들의 이해관계 덕에 신화화

그의 내한 작품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사망 10주기였던 지난 1997년 ‘갤러리 현대’가 38점을 소개한 바 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나 ‘국제 갤러리’가 3년여의 노력 끝에 어렵사리 성사시킨 이번 전시는 27점을 공수했고,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바스키아의 이번 출품작 가격은 최소 3억원부터 최대 1백30억원을 호가한다고 전해진다.

 
동시대의 신표현주의 화가 줄리앙 슈나벨이 메가폰을 잡은 1996년 전기 영화 <바스키아>는,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를 앞에 두고 감동에 복받쳐 흐느끼는 한 중년 흑인 여성과 그녀의 손에 붙들린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물론 소년은 바스키아의 유년이고, 이는 그가 예술가의 길을 택하는 드라마적 복선으로 연출된 듯했다. 하위 문화가 상위 문화로, 뉴욕이 서울로, 1980년대 상황이 2006년의 시간으로 각기 도약할 때 적지 않은 문맥 변화가 뒤따른다. 거장 반열의 작품이 시공간성의 변화를 거칠 때 해석 자체가 곧잘 길을 잃곤 한다.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그의 작업이 단지 SAMO인지, 혹은 정반대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바스키아가 사망 전후로, 남은 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실제 이상 신화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누가 부인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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