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할 자일스 선생님
  • 김상익 편집위원 ()
  • 승인 2006.10.2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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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익의 교육일기]

이따금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킬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가장 먼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당연히 친구들의 모습이다. 함께 어울려 못된 짓을 하고 다니던 일들도, 부끄럽지만 지우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새록새록 떠오른다. 몇몇 선생님들의 얼굴도 잊히지 않는다. 학생들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선생도 있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존경심을 품게 하는 선생도 있다. 하지만 나는 워낙에 게으르고 무심한 천성을 타고난 탓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직 단 한번도 선생님들을 찾아뵙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스승과 상봉하는 프로그램을 만나면 잽싸게 채널을 돌리는 쪽이다.

예나 지금이나 선생이란 직업은 학생들과 친해지기 어려운 모양이다. 지난 여름 한국에 와서 두 달 동안이나 머물렀던 아들과 딸아이는 틈만 나면 친구들과 놀았지, 그들로부터 선생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선생이 싫어서가 아니라, 왠지 불편하니까 선뜻 연락할 마음이 우러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2년 전 하와이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는 신통하게도 초콜릿을 선물해야겠다며 학교 선생을 챙겼다. 영어를 가르치던 데이비드 자일스(David Giles)라는 사람이다. 1년 전에는 그에게 한국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내게 DVD를 보내달라고도 했다.

나는 학교의 오픈 하우스 행사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그는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마이크로네시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문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3년 동안 고등학생들을 가르쳤다. 그후 미국에 돌아와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 6년째 영어 교사로 일하는 중이었는데, 전공인 영어(문학) 외에 유학생들을 상대로 한 ESL 과목을 자진해서 맡았다. 그는 영어에 능통하지 못한 아이들이 하루하루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교사로서 자기의 큰 보람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자일스 선생을 좋아하는 까닭

아들은 유학 첫 해인 9학년 때 그의 영어 수업을 들었다. 2002년 9월20일에 제출한 아들의 에세이 숙제를 나는 지금껏 보관하고 있다. 주제는 ‘미국에 와서 느낀 점’이었다. ‘친구들과 떨어지기가 싫어 미국에 오고 싶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그는 ‘그 마음 다 이해한다’라고 만년필로 적어 넣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 거리는 지저분하고 사람들도 거칠다고 생각했다’라는 대목에서는 ‘좋은 견해’라고 논평을 달았다. ‘학교 수업을 이해하기 힘들어 발표도 제대로 못하고 그저 다른 학생들이 하는 대로 따라갔다’고 어려움을 토로했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겠니’ 하는 동정의 글을 덧붙였다.

맨 마지막 코멘트에서 그는 ‘열심히 공부하면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밑줄을 두 줄이나 그으며 ‘잘했다’(Nice Job)고 칭찬했지만 평가는 엄격해서 83점이었다. 주제와 메시지 40점 만점에 35점, 묘사 및 어휘력 30점 만점에 24점, 문장력(문법) 30점 만점에 24점.

그는 평가에는 엄격했지만 매우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하고 특히 외국인에게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선생이었다. 아들이 졸업반에 올라갔을 때 그는 훌쩍 남미로 떠났다. 풍요롭고 안락한 미국보다는 궁핍하고 불편한 제3 세계로 가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에게는 더 큰 행복인 모양이었다. 아들은 그 전 해에는 그의 수업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12학년에 올라가서는 자기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가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자일스 선생을 무척이나 따르고 좋아했다. 나도 그를 좋아한다. 그가 숙제 옆에 지렁이처럼 꼬물꼬물 기어가는 글씨로 논평한 글을 보기만 해도 즐거워진다. 학생들에게 애정을 갖고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은 누구한테나 존경을 받는 법이다. 나는 이따금 자일스 선생한테 e메일이라도 보내느냐고 묻지만, 아이들은 선뜻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연락을 보내건 안 보내건 그 아이들 마음속에는 평생 잊지 못할 선생님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미스터 자일스’는 참으로 행복한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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