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싸운다
  • 문승진 (스포츠칸 기자) ()
  • 승인 2006.11.1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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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강자로 떠오른 한국계 데니스 강의 ‘삶, 꿈, 그리고 사부곡’

 
냉엄한 격투기 무대에서 맹활약하는 두 한국계 사나이가 있다. 프랑스 국적 데니스 강(29·아메리칸탑팀)과 일본 국적 아키야마 요시히로, 한국 이름 추성훈(31)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 국적은 아니지만 데니스 강은 경기에 앞서 애국가를 들으며 의욕을 불태웠다. 추성훈은 유도복 한쪽 가슴에 당당히 태극 마크를 달고 투혼을 발휘했다.

지난 11월5일 프라이드FC 무사도 웰터급 그랑프리 파이널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요코하마에서는 애국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파란 눈의 데니스 강은 비장한 각오로 사각의 링 위에 섰다. 상대는 미사키 가즈오(일본). 데니스 강은 어깨 부상에도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아쉽게 1-2로 판정패했다. 홈 텃세라는 시각이 컸다. 지난해 4월 프라이드 데뷔전 이후 5연승을 달렸던 데니스 강은 6전 만에 첫 패배를 당했다. 프라이드 무사도는 중경량급 파이터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무대이다.

데니스 강은 한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양어선을 타던 한국인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하지만 데니스 강이 태어날 때 아버지는 곁에 없었다. 어머니는 데니스 강을 데리고 캐나다로 건너갔다. 어머니 밑에서 자란 데니스 강은 격투기를 배웠다.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매트 위에서 달랬다. 캐나다에서 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데니스 강. 그는 아버지를 찾고 새로운 이종격투기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가 첫 타깃으로 삼았던 무대는 바로 스피리트 인터내셔널 아마추어 챔피언십. 데니스 강은 이 대회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중국 산타 대회 우승과 일본 극진 가라테 대회 8강에 빛나는 김재영을 강력한 펀치로 제압하며 순식간에 경기를 끝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의 주특기는 그라운드 기술인 주짓수. 하지만 국내 선수들은 그의 타격 앞에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렸다. 데니스 강은 원래 판크라스 등에서 경험을 쌓아온 파이터였다. 이 판크라스에서는 정상급 파이터인 스즈키 미노루를 격침시키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태극기와 한국 팬이 내게 힘을 준다”

데니스 강은 국내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2005년부터 세계 정상을 노리기 시작했다. 데니스 강은 일단 프라이드 무사도 무대를 목표로 삼았다. 마침 신설된 -83kg급(웰터급)에 나선 데니스 강은 오바 다카히로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프라이드 첫 무대라는 중압감 속에서 데니스 강은 결국 간단히 암바를 빼앗아내며 오바 다카히로를 침몰시켰다. 데니스 강은 안드레이 세메노프를 맞아 두 번째 대결을 펼쳤다. 그는 압도적으로 세메노프를 몰아쳐 3-0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데니스 강은 이 경기에서 주먹에 골절상을 입었고, 결국 2005년 웰터급 그랑프리 출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데니스 강은 마크 위어를 상대로 한 복귀전을 성공적으로 치러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후 데니스 강은 무릴로 닌자를 폭풍처럼 몰아치는 펀치로 쓰러뜨리며 프라이드 웰터급의 신강자로 급부상했다. 마침내 아마르 슬로에프마저 강력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로 침몰시키며 2006년 웰터급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웰터급 4강전을 앞둔 지난 9월24일 데니스 강은 비통한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에 빠졌다. 1년여 전부터 사귀어온 애인 셸비 워커(31)가 진통제를 과다 복용해 숨진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 본부를 둔 격투기 단체인 아메리칸 탑팀에서 함께 훈련하며 최고 전사를 꿈꾸었던 데니스 강에게 결혼을 약속한 애인의 죽음은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데니스 강은 실의에 빠져 주위와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결국 데니스 강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아쉽게 정상 문턱에서 무릎을 꿇었다. 데니스 강은 “챔피언 벨트를 꼭 가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섭섭하다. 비록 챔피언은 되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아쉽지는 않다.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줄 테니 기다려달라”고 밝혔다.

데니스 강의 말이다. “애국가가 울리고 태극기를 봤을 때 한국 팬들이 나를 많이 응원해주고 있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어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일본측에서 ‘정말 애국가를 틀거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틀어달라고 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랐고, 한국에서는 성공했다. 각각 의미가 있지만 특히 한국은 아버지가 한국인이었고, 나를 파이터로 활약할 수 있게 해준 나라다.”

 
지난 10월9일 일본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열린 K-1 히어로즈 더블토너먼트 라이트헤비급 결승전. 노래 ‘Time to Say Goodbye’가 경기장에 울려 퍼진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근육질의 몸매를 애써 유도복으로 가린 한 사나이가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유도복 상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는 태극기, 왼쪽 어깨에는 일장기가 새겨 있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은 경기장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그는 링 위에 당당히 올라섰다. 그의 이름은 바로 추성훈이다.
추성훈은 네덜란드의 강자 멜빈 만호프를 1라운드 1분58초 만에 암바로 꺾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찼다. 추성훈은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추성훈은 격투기 무대에 데뷔한 지 2년도 채 안 되어 9승1패라는 화려한 전적과 함께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다는 감격에 북받쳤다.

추성훈이 태극 마크를 달기 위해 한국에서 받았던 설움도, 지난 2002년 일장기를 달고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아쉬움도 격투기 무대에서 한꺼번에 씻어버린 한판승이었다. 
추성훈의 눈물은 굴곡이 심했던 그의 인생 행로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재일동포 4세인 추성훈은 일본 긴키 대학을 졸업한 1998년 4월 한국에 왔다. “할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서 태극기를 달고 한국인의 기상을 떨쳐라”는 아버지 추계이씨의 유언 때문이었다. 일본 대표가 되어달라는 달콤한 유혹까지 거절하며 한국행을 고집한 이유는 단 하나. 태극 마크를 가슴에 품기 위해서다.
하지만 금세 손에 잡힐 것 같던 태극 마크는 편파 판정과 텃세라는 높은 벽에 막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2001년 3월 꿈에 그리던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국제 대회 우승까지 이루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국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결국 2001년 10월, 그는 충격적인 ‘일본 귀화’를 선택한다. 추성훈이 아닌 야키야마 요시히로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한번 한국인은 영원한 한국인이다. 유도를 하기 위해 귀화한 것이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보란 듯이 금메달을 따낸 후 부르짖듯 추성훈이 내뱉은 말이다. 하지만 추성훈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며 결국 유도인의 삶을 마감했다. 2004년 12월 K-1 다이너마이트 대회. 유도인에서 격투 전사로 변신한 추성훈은 결국 정상에 우뚝 섰다.
추성훈은 12월31일 K-1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다이너마이트 대회에서 일본 격투기 미들급 간판 스타 사쿠라바 가즈시를 상대로  맞대결을 펼친다. 추성훈은 또 한번 일본의 자존심인 사쿠라바를 무너뜨리겠다고 자신한다. 그의 몸속에는 한국인의 뜨거운 혼이 흐르고 있다는 자존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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