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한 핵 포기 ‘3단계’로 요구한다?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11.2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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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 원자로 가동 중단하면 힐 차관보 방북 IAEA 사찰 요원의 재입국 허용도 요청할 듯

 
BDA(방코델타아시아) 은행 북한 동결자금 해제 문제는 아무리 보아도 이상하다. 피해 당사자인  북한측이 이미 해제되었다고 하는데, 한국·미국·중국이 나서서 아니라고 한다. 특히 당사자도 아닌 한국 외교부가 ‘그럴 리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BDA 자금 해제가 6자 회담의 중요한 협상 카드인데, 미국이 미리 해줄 이유가 없다”라며 남의 협상 전략까지 걱정해줄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정황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외교부는 그동안 ‘미국의 대북 정책이 변할 리 없다’라며 ‘불변론’을 펴왔고, BDA 자금 해제 역시 이와 직결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미국 중간선거 이후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전하고 있는 ‘향후 미국의 새로운 대북 정책 방향’을 들어보면 우리 외교 당국이 하루바삐 기존의 불변론을 벗어던져야 할 것 같다. 11·7 중간선거가 가져온 미국 사회의 변화는 바로 공화당과 민주당에 포진하고 있는  현실주의 세력의 ‘워싱턴 권력 탈환’으로 요약된다. 공화당 내 아버지 부시 인맥인 베이커·스코크로프트·게이츠 등의 현실주의자와, 북한과 직접 대화를 요구하는 민주당 현실주의자가 손을 잡고 럼스펠드로 상징되는 강경 우익을 몰아냈고, 그 결과 행정부 내 현실주의 세력의 적통인 ‘라이스 사단’이 대북 정책 주도권을 되찾아왔다.

이미 라이스 사단의 대북 접근 전략의 주요 특징들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징후가 바로 미국의 직접 관리 체제로 대북 정책 방향이 조정되고 있는 점이다. 즉 여태까지처럼 중국에 의존하거나 한국을 앞세우지 않고, 미국이 직접 북한과 교섭하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북한 문제를 미국의 관할로 두겠다는 뜻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거치면서 미국은 중국이 어떤 경우에도 미국 편에 서서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분간 말로는 중국 역할론을 유지하겠지만 내용적으로는 중국을 통한 간접 방식은 점차 폐기해나갈 것’이라는 지적이다.

6자회담 내에서 북·미 직접 대화 추진할 듯

사실 대북 직접 교섭은 지난 2004년 10월 라이스 국무장관 체제가 등장한 이후, 그를 정점으로 한 현실주의 사단의 모토였다. 그 선봉장 격인 힐 차관보가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북한 문제를 중국에 물어봐야 하는가”라고 반문한 데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그러나 11·7 중간선거 전까지 부시 2기 체제는 라이스로 대변되는 현실주의자와 체니 부통령, 네그로폰테 국가정보국장, 네오콘으로 대변되는 대북 강경파의 동거 체제였다. 국무부 현실주의자가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면 네그로폰테의 국가정보국과 네오콘은 대북 금융 제재를 주도함으로써 ‘9·19’의 발목을 붙잡는 식의 혼전이 계속되었다.

사실 부시 1기 정부 때부터 시작된 6자회담에는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 붕괴로 이끌겠다는 ‘네오콘 구상’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그래서 ‘미국이 6자회담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북한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까지 전해져왔다. 네오콘과의 동거 체제에서는 6자회담을 건너뛰어 북·미 직접 대화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6자회담 내 북·미 양자접촉’ 혹은 ‘6자회담과 평화협정 회담의 병행’이라는 편법이나 타협책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6자회담의 형식은 유지되겠지만, 북·미 직접 대화를 전제로 한 대북 구상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BDA 동결 자금 문제, 이미 안건에서 제외

그렇다면 이들의 대북 구상 내용은 무엇인가. 중간선거 이후 부시 대통령이 내놓은 한국전쟁 종전 발언 등 일련의 대북 유화 발언의 이면에는 이들의 대북 구상이 전제되어 있다고 한다. 워싱턴에서 나오는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미국의 새로운 대북 구상의 핵심은 바로 ‘핵실험 강행 이후의 북한’을 염두에 둔 단계별 접근 방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에 대한 정책 목표와 접근 방안은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워싱턴 한반도 전문가는 “미국의 전략은 두 단계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는 당연히 북한의 핵 포기를 유도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고 북한이 핵보유 국가로 남게 되는 상황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단계이다”라고 설명했다.

미국측의 단계 구분에 의하면 지금은 바로 핵 포기 유도 단계이다. 지난 11월18일 하노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한 ‘한국전쟁 종전’ 발언이나 라이스 국무장관의 ‘핵 보유국 불인정’ 발언 그리고 BDA 합법자금 문제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이 모두 직·간접으로 이와 결부되어 있다. 즉 북한의 핵 포기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외적으로 핵 보유를 인정할 수 없고 제재 및 압박을 계속할 수 밖에 없다는 방침을 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제재와 압박만으로 핵 포기 유도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대북 설득을 위한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즉 북·미 관계의 틀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미국의 새로운 대북 정책 요점은 바로 북한과의 극한적 대치 관계를 점차 해소해나간다는 것이다”라고 앞의 전문가는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의 한국전쟁 종전 발언이나 평화협정 주장이 미국 내에서 부쩍 자주 제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미 관계가 여전히 전쟁 상황이고 대북 적대 정책이 미국의 정책으로 남아 있는 한 북한을 설득해 핵을 포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북 적대 관계 및 전쟁 관계 청산’이 바로 핵 포기 유도를 위한 환경 조성의 문제라면, 앞으로 6자회담 등의 대북 협상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하려고 할까. “미국은 12월 중순 재개될 6자회담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을 이루려 하고 있다. BDA 자금 해제는 그에 앞서 북한측과 시범적으로 시도한 ‘1차 거래’였고,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내부 평가가 이뤄진 상태다.”(워싱턴의 정보 소식통) 미국은 이미 북한의 핵 포기와 관련한 3단계 요구안을 내부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1단계는 평북 영변의 5메가와트 원자로의 가동 중단. 2단계는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의 가동 중단. 3단계는 2003년 초 추방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요원의 재입국 허용 등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6자회담에서 미국이 제시할 전제 조건이라고 보도했으나 실제로는 북·미 협상의 각 단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세 단계 중 미국이 당면한 목표는 바로 첫 번째인 영변의 5메가와트 원자로 가동 중단에 모아지고 있다. 6자회담이 열릴 경우 북·미 양자 대화 등을 통해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협상을 전개할 것이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면 6자회담이 끝나자마자 다음 단계 단계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이다. 5메가와트 원자로 가동 중단과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은 이미 체니 부통령 등 네오콘이 하나의 옵션으로 묶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국무부 협상팀이 이 문제를 1차 타결 목표로 삼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2월 중순 열릴 6자회담의 내부적인 중요 안건은 이미 BDA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BDA를 둘러싼 거래가 매우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보고 그 다음 단계의 거래를 구상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적극적으로 고무하고 도와야 할 한국 외교부는 결과적으로 정반대 방향의 행보를 하는 꼴이다. 그것이 단지 체면치레 때문이라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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