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단군이 누군지 아시죠?”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6.12.0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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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학교 현지 취재/학생 수 급감해 존립 위기…민족 교육 통해 활로 모색

 
“<삼국유사>가 주목되는 건 단군 신화가 실려 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단군이 누군지 아시죠?” “예~.”

바깥 기온 영하 10℃. 외지인인 기자는 교실에 들어서서도 절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데, 이곳 토박이인 학생들은 이 정도 추위쯤은 끄떡없다는 듯 얇은 체육복 한 장씩만 걸쳐 입은 채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이린시(海林市) 해림시조선족중학교(교장 정송학) 역사 수업 시간이다.

그런데 수업 내용이 심상치 않다. 단군이 민족의 뿌리라고? 한국에서야 유치원생들도 외우는 상식이지만 중국 땅인 이곳에서야 어디 그런가. 이 학교 이주천 교사는 “2개월 전 역사 수업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단군을 들어보았다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라고 말했다. 조선족 학생들 거개가 체계적인 역사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없기에 조선족 역사는 물론 한민족 역사에 대해서도 ‘아조(아주) 깜깜했다’라는 것이다.

어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씨는 “내가 자랄 때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교육받아본 기억이 없다”라고 말했다. 본래 조선어문(국어) 담당 교사인 이씨가 역사 교사를 겸하게 된 것 또한 역사를 전공해서가 아니라 ‘평소 역사책을 많이 읽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번 학기부터 민족 교육을 본격 도입하기로 학교 차원에서 결단은 내렸지만 관련 교재도, 교사도 전무하다 보니 이씨가 총대를 메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 수업과 더불어 신설된 예절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박금희 교사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씨와 마찬가지로 조선어문 담당이면서 예절 교사를 겸하게 된 박씨는 “한복 옷고름 매는 법 하나를 가르치려 해도 제대로 아는 바가 없어 처음에는 퍽 답답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주변 어른들에게 물어보고 한국에서 나온 교재며 인터넷 사이트를 샅샅이 뒤지는 방식으로 수업을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족 학교가 민족 교육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하나. 위기를 헤쳐나갈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이다. 1984년 이 학교에 부임했다는 정송학 교장은 “처음에는 공부 잘 시켜 좋은 대학 보내면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성적 중심, 입시 위주 교육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더라는 것이다. “공부를 진짜 잘하는 아이들로 키우기 위해서는 민족 교육으로 마음가짐부터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정교장은 말했다.

교육의 위기는 비단 이 학교만이 직면한 문제는 아니다. 이날 민족 수업을 참관하러 온 헤이룽장성 내 다른 조선족 학교 교장·교사 20여 명은 ‘위기’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입에 올렸다. 한 학교 교장은 “이대로 가면 조선족 학교가 생존할 수 있을지조차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10년 사이 학교 수 절반으로 줄어

올해는 중국에서 조선족 근대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항일 민족 교육의 요람이자 조선족 근대 교육의 효시로 꼽히는 서전서숙(현 용정시 실험소학교)이 북간도 용정에 세워진 것이 1906년이었다. 그런데 근대 교육 100주년을 기념하고 찬양해야 할 오늘  ‘조선족 교육의 최대 위기’라는 자조 섞인 탄식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헤이룽장성을 포함해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療寧省) 등 조선족이 밀집해 있는 동북 3성의 교육 관계자들에 따르면, 조선족 학교들은 현재 삼중고에 처해 있다. 그 첫째는 규모 축소에 따른 고통이다. 1993~2003년 중 동북 3성 지역에서 폐교된 조선족 학교는 무려 8백5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폐교율이 가장 높은 헤이룽장성의 조선족 학교는 1997년 3백58곳에서 2005년 1백17곳으로 불과 10년 사이 절반 넘게 줄어들었다(그림 참조).

이렇게 많은 학교가 문을 닫은 이유는 무엇보다 학생 수가 격감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헤이룽장성 학생 수는 4만9천3백여 명에서 2만1천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개혁 개방 이후 농민들의 도시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이농 현상이 심화되었는데, 동북 3성 조선족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990년대 후반을 전후해 조선족들이 중국 대도시뿐 아니라 한국·일본 등지로 대거 이주하면서 조선족 학교의 학생 수 급감 현상은 한족 학교보다 더 빠르게 진행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중국의 산아 제한 정책 또한 학생 수 감소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 단 ‘한 자녀 낳기’를 강요당한 한족들과 달리 조선족 등 소수 민족은 중국 정부로부터 두 자녀 출생을 허용받아왔다. 그럼에도 조선족 중 두 자녀 이상을 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해림시조선족중학교의 경우에도 학생의 70% 이상이 외아들 또는 외동딸이었다. 

 
지린성의 연북조선족소학교 최정림 교장은 “조선족들은 교육열이 매우 높다. 적게 낳아 최선을 다해 기르자는 생각으로 한 자녀만 낳는 부모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족 출신의 한 공산당 간부는 “소수 민족에게 다자녀가 허용됐다 해도 출세하려면 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산아 제한 정책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경우도 많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학생 수가 줄고 외아들·외동딸들이 늘면서 조선족 학교가 직면한 두 번째 고통이 바로 공동체적 전통 질서의 해체이다. 정송학 교장은 “독자라고 집에서 오냐오냐 하며 기르다 보니 할아버지·할머니에게 예사로 반말을 하는 학생도 많다. 참을성도 없고 더불어 살아가는 훈련이 안돼 있다”라며, 이 때문에도 조선족 학교에서 전통식 예절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더 큰 문제는 해체 가정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이룽장성의 ㅇ조선족중학교가 최근 조사를 벌인 결과 부모와 함께 사는 학생은 전체의 2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전체 학생의 80% 가까이가 아버지 또는 어머니하고만 살거나 아예 부모 없이 살고 있는 한부모·무부모 가정 자녀였던 것이다.

“출세에 유리” 한족 학교 진학 늘어

다른 조선족 학교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얼빈시 동력구조선족소학교 권국화 교장은 “인근 도시나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나면서 조부모나 친척에게 자녀를 맡기는 부모가 많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정 교육을 기대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라는 권교장은 “똑같이 한 매를 맞아도 부모한테 맞는 거하고 친척한테 맞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의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해 아이들의 심성이 자꾸만 비뚤어지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결손 가정 자녀 교육 문제는 이들 조선족 학교의 최대 현안 중 하나가 되어 있다.

 
조선족 학교를 옭아매는 세 번째 고통은 정체성의 혼란에서 온다. 조선족 학교의 학생 수가 줄어든 데는 개혁 개방·산아 제한 정책뿐 아니라 한족 학교로 진학하려는 조선족 학생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현지에서는 분석하고 있다. 조선족 학생이 대부분인 데다 조선어(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조선족 학교에 다녔다가는 자녀가 한족 사회에서 성공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조선족 부모들이 한족 학교를 선택한 때문이다. 이런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일부 조선족 학교는 조선어와 한어(중국어)를 공용으로 채택하고, 영어 수업 비중을 크게 늘리는 등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오늘날 조선족 학교들은 이같은 삼중고에서 벗어나 자활의 길을 모색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다. 민족 교육을 강조하는 조선족 학교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족 학교가 살아남으려면 우수한 학생들을 배출하고, 우수한 학생들을 배출하려면 정신 교육부터 바로 서야 한다고 판단해 민족 교육을 강화하게 되었다는 정송학 교장은 “조선족은 중국인인 동시에 한민족이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뿌리를 깨닫게 되면 학생들이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 유산에 대해 더한 긍지를 갖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족 교육을 제대로 하고 싶어도 현재로서는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연북소학교 최정림 교장은 말했다. 이 학교에서도 예절 교육에 필요한 기본 자료가 없어 교사들이 온갖 데를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는 것이다.  

역사 부문에 이르면 문제가 더 심각하다. 현재 조선족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민족사를 학습할 기회가 없다. 정규 교육 과정에 민족사 관련 내용이 아예 빠져 있는 것이다. 역사 교재는 더더욱 없다. 지난해 지린성 훈춘5중학교가 <우리민족 력사독본>를 자체 편찬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는 유일한 교재이다. 이와 관련해 지린성의 한 교사는 “중국 정부가 소수 민족의 역사 교육을 간섭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가워하지도 않는 분위기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동북공정이 최대 화제이지만, 고대사는커녕 한국사 전반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쌓을 기회가 부족한 것이 현지 조선족들의 사정인 셈이다.

인프라 부족에 허덕이는 조선족 학교들은 한국 기업과 민간 단체의 지원에서 한 가닥 희망을 찾고 있다. 최근 연북소학교와 해림시조선족중학교는 한국 KTF 도움으로 한민족 예절·문화·역사 교육 전담 교실을 확보했다. 연변대 객좌 교수를 겸하고 있는 조남철 교수(한국방송통신대·국문학)는 조선족을 귀중한 민족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앞으로 이들에 대한 지원을 크게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족 2백만명이 우리와 역사적·문화적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면 한국이 거대 시장 중국을 개척하는 데도 엄청난 우군을 확보하게 되는 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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