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현실 더 잔혹한 판타지
  • 김형석(<스크린> 기자) ()
  • 승인 2006.12.0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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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감독 : 길예르모 델 토로 주연 : 이바나 바쿠에로, 더그 존스, 세르지 로페즈

 
요즘은 컴퓨터그래픽으로 뒤범벅된 ‘디지털 테크놀로지 영화’와 동의어처럼 사용되기도 하지만, 원래 ‘판타지’는 매우 아날로그적인 장르였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같은 시리즈가 판타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지만, 원래 판타지는 호러나 SF(공상과학)나 포르노 같은 장르들을 아우르는 개념이었으며, 그 장르들은 거대한 스펙터클보다는 비현실적 설정과 충격 효과를 통해 나름의 미학을 구축해왔다. 그런 면에서 <판의 미로>는 최근의 판타지 경향에 속하면서도 그 표현 방식에서는 고전적 느낌 또한 지닌다.

데뷔작 <크로노스>(1993)부터 전세계 판타지 마니아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블레이드 2>(2002) <헬보이>(2004) 등으로 할리우드 박스오피스를 평정한 후 <판의 미로>(2006)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판의 미로>에서 역사와 전설, 신화와 비극, 동화와 현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영화의 배경은 레지스탕스 전투가 한창인 1944년의 스페인. 내전을 진압하기 위해 비달 대위(세르지 로페즈)가 파견되었다. 마을을 장악하고 소탕 계획을 세우는 비달. 그곳으로 소녀 오필리아(이바나 바쿠에로)가 만삭인 엄마와 함께 온다. 소녀의 새아버지인 비달. 하지만 그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군인일 뿐이다.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어른용 동화

이 차가운 현실을 극복하는 것은 따스한 판타지다. 요정 판(더그 존스)을 만난 오필리아는 자신이 지하 왕국의 공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고자 세 개의 열쇠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소녀의 길을 밝혀주는 것은, 혼자 볼 때만 그림이 그려지는 두꺼운 책과 벽에 선을 그으면 문이 생기는 마법의 분필과 팅커벨처럼 날아다니는 요정들. 괴물 두꺼비의 몸속에서 첫 번째 열쇠를 꺼낸 오필리아는, 손바닥에 눈이 달린 괴물에게서 두 번째 열쇠를 빼앗아내지만 그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어기고 말아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세 번째 임무에 성공하면 다시 지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오필리아. 하지만 순수한 피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는, 방금 태어난 자신의 남동생을 희생시켜야 한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판의 미로>는 컴퓨터그래픽이라는 화학 조미료로 급작스럽게 맛을 낸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라, 분장이나 미술 같은 영화 매체의 기본 재료와 요리사(감독) 특유의 비법으로 푹 우려내고 감칠맛을 더한 전통 음식과도 같다. 이 영화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와 동화와 역사의 모티프들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다. 그것을 기본으로, 감독은 급박한 상황과 판타지 캐릭터를 창조하며, 가끔은 기괴한 시각적 유머를 보여주기도 한다. 델 토로 감독의 판타지는 웅장하지는 않지만 약간은 악취미적인 잔재미들로 가득하다. 집채만한 두꺼비, 요정을 씹어먹는 괴물, 찢어진 입을 스스로 꿰매는 비달 대위, 진저브레드(생강 빵)맨 같은 나무뿌리, 특수 분장의 극치를 보여주는 요정 판 등, <판의 미로>는 환상적 캐릭터들의 진수성찬이다.

하지만 <판의 미로>가 매혹적인 근본적 이유는, 극도의 판타지와 냉엄한 역사적 배경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비극 효과다. 판타지 세계 속에서는 온갖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 밖에서는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죽어간다. 그 사이에 오필리아가 있는데, 소녀는 두 세계를 오가며 환상과 비극을 경험하다가 결국에는 희생자가 된다.

여기서 <판의 미로>는 야만과 폭력과 증오와 살육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존재는, 마초적 영웅이 아닌 작은 소녀라고 이야기한다.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 판타지에서 벗어나 어떤 ‘메시지’를 지닌 작품인 것은, 또 과거와 신화를 바탕으로 한 옛날 이야기에서 벗어나 현재에도 울림을 주는 영화가 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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