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 살인 일삼는 인터넷 망나니들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1.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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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수배, 인민재판식 사이버 공격 피해 '상상 이상'

 
사기꾼을 현상 수배합니다.” 서울의 한 대학에 다니는 김 아무개씨(24). 김씨는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포털 사이트에 자신의 사진이 붙은 ‘현상 수배’ 전단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과 주소, 나이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전단지의 내용은 ‘빌려간 돈을 갚지 않아 공개 수배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내막을 알고 보니 친구가 장난 삼아 올린 것이었다. 수배 전단은 이미 곳곳으로 퍼져나가 삭제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일을 겪은 후 김씨는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등 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장난 삼아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피 흘리는 꼴이다.
지금 ‘고발의 바다’ 인터넷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각종 ‘수배 전단’이 흘러 다닌다. 경찰이 내린 수배 전단이 아니다. 대부분 네티즌이 만들어 뿌린 것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묻지마’ 수배 전단도 상당수다.
물론 이 중에는 절박한 심정에서 올린 현상 수배도 있다. 의류 도매상을 하는 박 아무개씨는 사기업자한테 물품 대금 수천만원을 떼이자 인터넷을 통해 공개 수배령을 내렸다. 경찰에 수사를 요청한 후 자신이 따로 범인 추적에 나선 것이다. 네티즌에게 여러 게시판으로 퍼나를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자신을 ‘곤달장군’이라고 소개한 네티즌은 경찰의 수배 전단을 재구성해 용의자의 얼굴 사진을 확대해서 인터넷에 올렸다. 지난해 11월 서울 동대문에서 발생한 70대 노인 살해 사건의 피해자가 친구의 모친이라고 밝히고 네티즌의 협조를 구한 것이다. 이를 본 네티즌이 각종 포털 사이트와 게시판 등에 퍼 올리면서 화제가 되었다.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미제 납치 사건을 네티즌이 공개 수배령을 내리며 추적에 나서기도 한다. 온라인국민수사본부(www.wanted 1991.org)는 1991년에 일어났던 고 이형호군의 납치 사건을 소개하며 유괴범 잡기에 나섰다. 사이트에는 당시 사건 파일에 해당하는 유괴범의 실제 목소리와 필적 등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이트는 오는 2월 1일 개봉하는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래서 납치 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 홍보’가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도 나온다.
인터넷 사기 피해자가 많은 경우 피해자들은 집단 행동에 나선다. 다음·네이버 등 사이트의 카페에 방을 만든 후 공개적으로 ‘사이버 수사’를 실시하기도 한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벼룩사기녀’ 사건이 대표적이다.
사기 피해자 1천여 명이 ‘벼룩사기 김○○ 꼭 잡는다’는 이름으로 카페를 만들고 공개 수배령을 내린 것. 김씨의 인적사항 등 개인 정보도 자세하게 올려놓았다. 네티즌의 움직임에 경찰도 전담반을 편성한 후 수사에 나섰고, 김씨는 곧 검거되었다. 네티즌의 공개 수배령이 김씨의 사기 행각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하지만 김씨의 사생활은 완전히 발가벗겨졌다. 피해자들이 김씨의 사진과 미니홈피 내용 등 개인 정보를 무차별로 유포하면서 개인 신상이 공개된 것이다. 때문에 범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생활과 가족이나 친구들까지 간접적인 피해를 보아야만 했다.


피해자 두 번 죽이고, 피의자 인생 망가뜨려


 
‘벼룩사기녀’ 사건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터넷 사기 사건에서 피해자들이 용의자의 개인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 게다가 아예 인터넷 사기 피해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트(thecheat. co.kr)까지 등장했다. 이곳에는 7천여 건의 각종 인터넷 사기 피해 사례가 접수되어 있으며, 용의자 이름과 연락처는 물론이고 개인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밀을 요하는 기업 정보나 개인 사생활도 올라와 있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비밀도 없고 사생활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이처럼 네티즌의 인터넷 고발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디지털 카메라와 컴퓨터만 있으면 ‘네티즌 경찰’ 행세를 할 수도 있다. 인터넷을 ‘신문고’로 생각한 네티즌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온갖 부정 부패를 신고하기도 한다. 힘 없는 개개인이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힘을 모아 사적으로 복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직접 피해 당사자가 아님에도 스스로 해결사를 자처하는 네티즌도 있다.
여기에는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거나 새로운 범죄를 예방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무분별한 고발이 이어지면서 피의자의 인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인터넷에서 네티즌은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인민재판식 즉결 심판도 뒤따르기도 한다. 이른바 ‘네티즌 경찰’로 불리는 부류도 다양하다. 크게는 ‘해결사형’ ‘묻지마형’ ‘대리만족형’ ‘영웅호걸형’ 등으로 나뉜다. 아예 직업적인 ‘범죄 사냥꾼’으로 나선 경우도 있다.
문제는 온라인에서 ‘공개 수배’ 사례가 늘어나면서 인권 침해 사례 또한 증가한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인권 사각지대’ ‘문명의 흉기’로 불리는 이유다. ‘인격 살인’이나 ‘카더라’식의 검증되지 않은 온갖 소문들이 마치 실제인 양 올려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개인 정보를 캐내 인민재판식 사이버 공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 혜화경찰서 사이버수사대 김동률 경사는 “인터넷 범죄가 늘어나면서 피해자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아무리 범죄 피의자라도 개인 사생활은 보호돼야 하고 인권도 지켜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신종 인권 침해는 광범위하고 그 피해는 치명적이다. ‘재판에서 유죄라고 판정하기 전에는 누구든지 무죄’라는 ‘무죄 추정 원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네티즌의 지나친 공명심이 피해자를 두 번 죽이거나, 피의자의 인생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결혼을 두 달여 앞두고 파혼당한 한 아무개씨(27·여)는 인터넷 고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다. 한씨의 친구가 인터넷 사기꾼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애꿎은 한씨까지 사기꾼으로 몰렸다. 자신의 미니홈피가 네티즌에게 공개되면서 홈피에 올려놓았던 사진이 마구잡이로 퍼져나갔고, 이를 본 남자 집에서 결혼 취소를 통보해와 파경을 맞았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정보화 시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미성숙을 드러낸 것이라고 본다. 인터넷이 사생활을 침해하는 순간 이미 ‘폭력’이라는 시각이다.
범죄도 막고 인권도 지키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네티즌의 성숙한 인터넷 문화를 시급히 정착시켜야 한다.   


정락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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