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대선을 북한이 쥐락펴락?
  • 김세원(고려대 초빙교수) ()
  • 승인 2007.01.3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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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선거 '북풍' 따라 크게 요동...노무현 후보, 순수 북한발 북풍 덕 봐

김세원 (고려대 초빙교수)

 
대선 정국에 벌써부터 북쪽에서 삭풍이 몰아치고 있다. 역대 대선과는 그 양상과 강도가 사뭇 다르다. 그동안 남북한 권력자들은 항상 민족 통일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뒤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분단 상황을 활용해왔다. 역대 권위주의 정권의 대통령들은 심지어 총선이나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 북한 관련 사건을 내세워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어 표몰이를 노리는 행태도 서슴지 않았다.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목할 만한 사실은 북한이 1월1일자 신년 공동 사설에서 한나라당을 직접적으로 거명해 비판하고 남한의 대통령 선거에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다. 북한은 “지금 한나라당을 비롯한 반동 보수 세력은 …발악적으로 책동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매국적인 친미 반동 세력을 결정적으로 매장해버리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 있게 벌여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의 대남 선전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도 1월4일 “한나라당의 재집권 책동은 결코 남조선 내부 문제로만 될 수 없고 나라의 평화와 통일, 민족의 사활과 관련된 문제이다”라고 주장했다. 조평통은 또 “한나라당과 같은 반동 보수 세력이 집권하게 되면 6·15(공동선언)가 날아가고 북남 화해와 협력이 중단되며 우리 민족이 핵전쟁의 참화를 입게 될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 우리 민족의 누구도 이 땅에 재앙을 몰아올 한나라당의 재집권 책동을 결코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다”라고 역설했다.
 
선거 때마다 불어닥치는 북풍(北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67년 5월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둔 4월21일, 무장간첩 2명을 생포하고 1명을 사살했다는 무장간첩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되는 등 간첩 사건 5건이 잇달아 발표되었다. 1971년 대선 때는 선거 1주일 전 보안사령부가 서준식씨 등이 포함된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중앙정보부가 간첩 및 간첩단 사건 5건을 차례로 터뜨렸다.
1970년대까지 ‘선거철은 간첩단 사건의 계절’이라고 할 만큼 간첩 사건이 단골 소재였다면 1980년대 이후는 좀더 폭발력이 큰 북한 관련 사건이 선거에 맞춰 등장한다.
1987년 대선 보름 전인 11월30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사건은 전국민을 충격 속에 빠뜨렸다. 사건을 일으킨 북한 공작원 김현희는 선거 하루 전날, 양 손목과 입에 자해 방지용 테이프가 붙여진 모습으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야당의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1992년 대선 때는 중부지역당 사건이 있었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이선실이 서울에 잠복해 조직원 3백명의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했다는 이 사건 역시 대선 2개월 전에 발표되었다.
선거에서의 북한 변수를 가리키는 ‘북풍’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다. 북풍은 남북 간에 극비 커넥션이 있어 북풍이 주문 생산되지 않았느냐는 의혹과 함께 주목되었다.


DJ 정권, ‘총선용 북풍’ 일으켰다가 참패


 
1996년 4월11일 국회의원 총선거 직전 벌어진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 시위 사건과 관련해 1997년 <시사저널>은 여권이 대북 밀사를 동원해 북한에 식량과 물자를 지원해주는 대신 총선 전에 ‘적정한 수준의 무력 시위’를 해달라는 주문을 했다고 보도했다.
<시사저널>은 안기부 특수공작원들이 대북 공작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접촉한 북한 대남 공작 수뇌부와의 대화를 담은 녹음 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하고 대북 사업을 하고 있던 재벌그룹 등을 통해 실제 비밀 지원이 이루어졌다고 폭로했다. 장학로씨 비리 사건 등으로 선거 참패가 예상되던 여권은 이 무력 시위 사건 덕분에 압승했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북풍의 변형인 ‘총풍(銃風)’이 등장했다. 이회창 후보가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북한측과 접촉해 대선 직전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총격 시위를 하도록 요청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법정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법원은 ‘북한의 대선 관련 동향을 알아보는 차원을 넘어서 북한에 무력 시위를 요청하기로 모의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관련자인 J그룹 고문 H씨는 검찰과 법원에서 일관되게 자신이 북측에 무력 시위를 요청했다고 진술했다. 총풍 시도가 성공했더라면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보수 성향의 표가 결집되도록 여권에서 북풍을 일으키려 했던 것은 과거 정권과 맥락을 같이한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북풍은 ‘살을 에는 듯한 삭풍에서 따뜻한 훈풍’으로 일대 전환을 맞게 된다. 이에 따라 북풍이 불면 유권자들의 안정 희구 심리와 북한 경계 심리가 발동해 강경한 대북 정책을 펴는 여당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도식도 무너졌다. 2000년 4·13 총선을 사흘 앞두고 김대중 정부가 전격적으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발표했으나, 집권 여당은 오히려 총선에서 패배했다. 확연히 드러나는 ‘정략성’이 표심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도 그동안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남북 간의 깜짝 이벤트를 통해 표심을 단련시켜왔던 셈이다. 이 발표에 대해 한나라당은 ‘총선용 신북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2년에는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두고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이용한 핵개발에 나서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투표 1주일 전, 북한이 핵동결 해제 선언을 함으로써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과거의 북풍이, 정부 여당이 선거 결과를 유리하게 이끌어내기 위해 벌인 기획성 행사의 성격이 짙다면 2002년의 북풍은 순수 북한발이라는 점에서 크게 달랐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여당 후보였으나 햇볕정책을 계승해 야당보다 온건한 대북 노선을 펼쳤다. 그는 북핵 위기가 다시 닥친 상황에서 대통령을 누구로 뽑느냐는 것은 곧 전쟁이냐 평화냐를 택하는 것이라며 이회창 후보를 공격해 결국 승리했다. 노대통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장인의 친북 행위 의혹에 휘말렸을 때도 “그렇다고 조강지처를 버리란 말이냐”라는 특유의 감성적인 호소를 통해 정면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김대중 정부의 탄생으로 북한과의 화해 협력 세력이 처음으로 우리 사회의 지배 계층으로 편입되면서 대통령 선거와 북풍의 관계는 한층 복합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북한의 선거 개입이 오는 12월19일 대선에서 대북 화해 협력 세력과 포용 정책 회의 세력 중 어느 쪽을 궁극적으로 돕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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