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은 있어도 포기는 없다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1.3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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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배신, 고난과 시련 이겨낸 새터민들의 '성공 이야기'

 
새터민들이 북한 국경을 넘는 것은 배고프고 무섭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 ‘남조선 드림’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새터민들이 꿈꾸는 삶은 의외로 소박하다. 큰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그저 낯선 남한 사회에서 배고픔을 잊고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터민이 꿈꾸는 ‘남조선 드림’의 참모습이다.
새터민들에게 낯선 남한 땅은 온통 가시밭길이다. 외로움·소외감·막막함·두려움·불안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배곯지 않는 것을 빼고는 최악의 상황이다. 때문에 대다수 새터민들은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기 일쑤다. 
그러나 새터민에게도 ‘무에서 유를 창출한다’는 성공 신화는 있다. ‘탈북자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당당하게 성공한 사람들. 그 이면에 자리잡은 그들만의 아픔은 시리고도 시리다.
김용·전철우·김혜영. 이 세 사람은 새터민 중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로 꼽힌다. 성공한 사업가들이기도 하다. 새터민과 연예인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지만, 시련과 좌절을 겪으면서 ‘성공’을 거머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연예인이라는 프리미엄이 결코 성공이라는 열차의 무임 승차권이 되지는 않았다.


 
새터민 사업가 1호 김용의 ‘2전3기’


‘새터민 1호 사업가’로 널리 알려진 김용씨의 성공담도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성공은 그야말로 실패가 만들어낸 값진 결과물이다. 그도 처음 남한에 왔을 때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이른바 ‘3줄’로 불리는 혈연·지연·학연도 없었다. 밀고 당겨주는 이 하나 없는 외톨이 신세였다.
김씨가 본격적으로 돈을 번 것은 연예계에 진출하면서다. 새터민 출신 연예인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잘나가는 연예인’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돈도 많이 벌었다.
김씨는 연예인보다는 사업가의 길을 더 원했다. 전 재산을 들여 식당 사업을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남한 속의 북한’ ‘연예인 김용’이라는 간판은 절반의 성공을 보장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사업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돈과 유명세가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김씨의 식당은 1년6개월 만에 망하고 재산은 거덜이 났다. 투자자들은 빚더미에 앉았고, 김씨는 실패한 새터민으로 남을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 식당 주방보조에서 화장실 청소 등 밑바닥 인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사업 자금을 마련해 또다시 음식 사업에 손을 댔다. 역시 실패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배신의 쓴 경험까지 겪어야만 했다. 급기야 가정 불화로 이혼까지 당하면서 절망은 극에 달했다. 시작하는 사업마다 미끄럼틀을 탔고, 삶과 죽음을 오가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연예계와 새터민들 사이에서 “김용은 이제 끝났다”라는 비아냥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다시 일어섰다.
경기도 일산에서 시작한 ‘모란각’은 30평으로 시작해 지금은 1백60평이 넘는 가든형 식당이 되었다. 지난해까지 국내외에서 80개가 넘는 체인점도 개설했다. ‘부자 김용’으로 다시 우뚝 선 것이다. 김용은 새터민들에게 따끔한 충고 한마디를 던진다. “남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은 바보다. 현명한 사람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새터민들의 수동적인 자세를 꼬집는 말이다. 김용씨와 같은 연예인 출신 사업가 전철우씨와 김혜영씨도 온갖 고난을 헤치고 성공을 얻었다.
새터민들의 자랑인 백두식품의 성공 스토리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이 회사는 1995년에서 1997년 사이 탈북한 윤성철씨(46) 등 6명이 모여 만들었다. 이들이 직접 공장을 차리게 된 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사업 아이템은 느릅 제품. 느릅은 북한에서는 명절 식품으로 각광받았지만 남한에서는 약재로 사용할 뿐이었다. 몸에 좋다는 것은 혐오 식품도 마다하지 않는 남한 사람들에게 느릅으로 만든 제품은 충분히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최초 사업 자금은 6명의 정착 지원금 거의 모두를 털어서 마련했다. 이들 6명은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공동 생활을 했다. 북한에서 생활화된 ‘공동 사용’ ‘공동 분배’를 철저하게 지켰다. 월급은 한 푼도 가져가지 않고 원시적인 생활로 버텼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도 당하면서 남한에서의 혹독한 시련기를 보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웰빙 바람은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주 생산품인 느릅냉면·느릅찐빵·육수 등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종교 단체와 새터민 단체 등에서 주문이 밀려들었고, 유통업체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
그리고 2005년 2월. 백두식품은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의 6백 평 대지에 공장을 신축했다. 매출도 껑충 뛰어 적자가 흑자로 반전했다. 월평균 1억5천여 만원의 매출을 기록해 중견 기업의 면모를 갖추었다. 전국 규모의 유통망도 구축했다. 현재 전국 14개의 대리점에 3백 개가 넘는 직거래점을 확보하고 있다. 직원 25여 명 중 15명이 새터민이다. 백두식품은 올 3월에 서울 서초동과 경기 부천에 직영 식당을 열 계획이다.
윤성철 공동대표는 “우리 회사는 새터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새터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새터민 공동체다”라고 말했다.


국가보위부 출신 여장부의 ‘뚝심’


 
서울 상계동에서 북한 상품 전문점인 평양상점을 운영하는 김명심 사장. 김사장은 북한에서는 제법 잘나갔던 국가보위부(남한의 국정원) 출신이다. 하지만 남한에 와서는 먹고 살기 위해 10개월간 공사판을 전전하며 미장일을 했다. 김사장이 평양상점을 차린 데는 주변의 도움이 컸다. ‘뚝심이’로 통했던 그에게 한 지인이 북한 식품을 판매하도록 권유했던 것. 김사장은 정착금과 건설 현장에서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렸다. 현재 판매 상품 수는 2백여 가지. 모두 북한에서 직수입한다. 최근에는 인터넷 판매 등으로 유통 채널을 다양화하면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북한에서의 특기를 살리면서 성공 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새터민들도 많다. 평양통일예술단 김영남 단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김단장은 평양의 대학에서 음악학부를 졸업한 후 북한평양예술단 작곡가 겸 단장으로 활동했다. 탈북한 후 북한 예술단 출신 단원들을 모아 평양통일예술단을 창단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80회 이상 공연했을 정도로 새터민 출신 대표 예술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밖에도 100년한의원 석영환 원장, 하나영상센터 허영철 사장, CD씽크 박창덕 사장 등이 새터민 출신으로 정착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북한이탈주민후원회 이강락 사무총장은 “남한 사람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 배울 것은 배우고 따질 건 따져라. 이를 악물고 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살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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