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폐된 젊음'의 슬픈 아우성
  • 왕성상 편집위원 ()
  • 승인 2007.03.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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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백수' 1백20만명 시대가 도래했다. '졸업=실업'인 그들에게 출구는 없는가

 
제1000000호
졸업 실업증서
성명 이태백 (이십대 태반이 백수)
주민등록번호 800614-**48128
위 사람은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청년 실업자
가 되었으므로 본 증서를 수여합니다.
한국대학교 총장
실업자
며칠 전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뒷문 앞에서 검은색 학사모를 쓴 청년들이 들고 서 있던 피켓 내용이다. 한국대학생총연합회 등 6개 학생단체 회원들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쏟아지는 현실을 비판하며 정부에 청년 실업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피켓은 ‘대학 졸업장=실업 증서’로 대학을 나와도 당장 일할 곳이 없는 자신들의 ‘백수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기도 했다.
울고 싶은 청년 백수들의 현주소는 대학 졸업식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들뜬 분위기였지만 대다수 졸업생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취업자가 소수인 데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명색이 졸업이기에 겉으로는 웃지만 백수로 전락해 속으로는 울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2월 하순 서울 지역의 한 여자대학교 졸업식장. 석사모를 쓴 대학원 중국어교육학과 졸업생들이 사진을 찍으며 미소 지었지만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교원 임용 시험에 1명도 붙지 못해 그늘이 드리워진 것이다. 한 졸업생은 “동기생들이 공립학교 선생이 되기 위해 시험을 봤지만 다 떨어졌다. 시험이 갈수록 어려워져서 교사 되기가 힘들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2~3년 전부터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 학교 관계자의 설명이다.
다른 몇몇 대학 졸업식장에서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취직을 못한 졸업생들이 나오지 않아 빈자리가 많았다. 취업난 때문에 썰렁한 졸업식이 되어버린 가슴 아픈 현장이다.
졸업 학번에 맞게 식에는 참석했지만 취업 때까지 졸업을 미루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졸업식이 청년 실업의 파고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시련과 좌절을 안겨주는 ‘고난의 통과의례’로 바뀌어가고 있다. 취업 재수생은 보통이며 3~4수생, 심지어는 6~7수생까지 있고 ‘묻지마 취업’을 노리는 사람도 많다. 대졸자들의 실업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올 1월 9명을 뽑은 인천항만공사 직원 공채 때 7백41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고 신입사원만 따지면 8백25 대 1로 청년 실업의 우울한 단면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웬만한 회사의 경쟁률도 수백 대 1이다.
약 1백20만명에 달하는 청년 실업자의 어두운 면과 후유증은 사회 곳곳에 파장을 일으키며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실업 양극화 현상과 사회 문제 양산, 흔들리는 대학 교육이다. 실업 문제의 폐해는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더욱 부각되고 있다. 각종 범죄가 생겨나고 교육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카드 돌려 막기, 절도·사기·강도 짓을 하다 경찰에 붙잡히는 이들이 그 사례다. 심한 경우 우울증을 앓고 자살까지 하는 백수들도 생겨나 주위를 안타깝게 만든다. 거의가 취업을 못해 막다른 길에 몰린 청년 실업자들이다.


대학 학과도 ‘빈익빈 부익부’

 
대학 교육도 진정한 상아탑으로서 학문을 위한 교육보다 취업 우선주의로 흐르는 추세다. 취업에 직결된 토익 강좌, 외국어 회화, 각종 시험 준비반 운영은 기본이고 1학년 때부터 취직 공부를 강하게 시키고 있다. 대학에 따라서는 주임교수·학과장·대학장의 능력 평가를 학생 취업률로 따지는 곳이 있을 정도다. 연줄 대기, 대학 마케팅, 기업과의 산학협동 체제 마련도 같은 맥락이다. 취업 목적으로 졸업을 미루며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흔하다. 전국에 ‘대오생’(대학 5학년 학생)이 생겨난 지 오래되었다.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대학의 전과도 취업이 잘되는 인기 학과 중심으로 쏠리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주로 지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기업이 적은 전북 지역.
전북대의 경우 지난 2월16~17일 재학생을 대상으로 ‘전과 지원자’를 모집한 결과 취업 인기 학과가 많은 상대는 전입 지원이 81명에 이르렀으나 전출은 9명에 그쳤다. 사범대도 전입 지원자가 72명으로 전출 지원자(3명)를 훨씬 웃돌았다. 학과별로는 경영학과 40명, 행정학과 20명, 법학과 19명, 경제학과 13명, 영어영문학과 12명 등의 순으로 전입 희망자가 많았던 반면 농업경제학과, 산림자원학과, 조경학과, 불어불문학과, 철학과 등은 지원자가 1명도 없었다.
2월9~11일 전과 희망자를 모집한 원광대도 지원자(3백91명) 대부분이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학과에 몰렸다. 국어교육학과 4.5 대 1(2명 모집), 영어·일어·국사·수학 교육학과 각 4 대 1(각 2명 모집)의 경쟁률을 보였다.
교육계 관계자는 “취업난 여파로 전과도 상대적으로 취업에 유리한 상대와 사범대로 몰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기초 학문을 전공해서는 취업이 어려운 세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취업난의 근본 문제는 정부 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노무현 정부는 ‘한 해 일자리 30만 개를 창출하겠다’며 정책들을 쏟아냈지만 실업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2002년 2천2백16만여 명이었던 취업자 수는 지난해 2천3백15만여 명으로 참여정부 4년 동안 1백만 개의 일자리도 만들지 못했다. 더욱이 25∼29세 젊은이들 중 비경제활동인구는 1백7만여 명으로 2003년 10월 이후 최대치였다.
또 지난해 20대 취업자 수는 연평균 4백6만여 명으로 2005년보다 14만여 명(3.5%), 15~19세 취업자 수 역시 20만여 명으로 13.9% 줄었다. 올 들어서도 일자리가 감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1월 취업자 수가 7개월 만에 가장 저조한 것으로 나타나 정부 목표에 빨간불이 켜졌다.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지만 일자리 찾기를 포기한 구직 단념자는 17개월 만에 가장 많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기업 채용 인원 대부분이 비정규직


청년 백수에 국한할 경우 지난해 4년제 대학 졸업자 중 미취업자는 약 17만명.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이 중 9만명가량은 20대다. 이태백, 삼팔선, 오륙도에 이어 ‘이구백’(20대 중 90%는 백수), ‘십장생’(10대들도 장차 백수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대학 4년을 다니고서도 취업을 위해 졸업을 늦추는 ‘엔지(NG·No Graduation)족’ 같은 신조어도 생겨나고 있다.
청년 백수와 더불어 비정규직 양산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하루살이’에 비유되는 비정규직은 취업난과 맞물려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흐름을 잘 이용하는 곳이 대기업이다. 채용 전문기업 코리아리크루트가 지난 2월 중순 매출액 기준 500대 기업 인사 담당자를 상대로 올해 비정규직 채용 동향을 조사한 결과에서 잘 드러난다. 조사에 응한 1백48개 기업 중 약 68%가 비정규직을 뽑을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 중인 비정규직 유형은 몇 가지로 나뉜다. 계약직(67.3%), 용역직(16.5%), 파견직(7.8%), 재택 근무 형태인 가내 근로직(5.3%) 등의 순이다. 이들 기업은 경영·사무관리(31.4%), 영업·마케팅(17.1%), IT·정보통신(14.2%), 기술·과학·연구(12.4%) 직종에서 비정규직을 뽑을 것으로 알려졌다. 채용 이유도 갖가지다. △인력 운용의 신축성 확보(43.5%) △인건비 절감(36.4%) △노조 형성에 대한 부담 감소(15.1%)를 꼽았다.
이에 따른 제도권의 정규직과 비제도권의 비정규직 사이 임금 격차도 크게 벌어지고 있다. 하는 일과 능력, 경력이 같은데도 그렇다. 최근 통계청이 내놓은 ‘정규직·비정규직 고용 실태’ 조사 자료가 이를 증명한다. 2006년 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1백90여 만원, 비정규직은 약 1백20만원으로 70여 만원 차이가 난다. 그러나 비정규직 평균 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100만원 미만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대학·대학원을 나오고 석·박사 학위를 땄지만 당장 갈 곳이 없는 청년 백수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제 아르바이트, 일당제 임시직, 시한부 계약직 등 다양한 비정규직이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현실이다.
심지어 한창 일할 나이인 30~40대도 비슷한 액수를 받으며 연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취업 정보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오는 7월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을 앞두고 오히려 회사에서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비정규직들의 한숨 소리는 날로 커진다. 중간에 잘릴까 봐 말도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정규직으로 가는 길은 바늘구멍이다. 우리은행이 지난 2월15~22일 개인금융서비스직군(창구직 직원) 입사원서를 접수한 결과가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3백50명 모집에 1만3백50여 명이 모여들어 30 대 1의 경쟁률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는 박사학위자 3명, 석사학위자 2백여 명이 끼어 있어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졸업 예정자 포함)도 80여 명에 이르러 금융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처럼 유례없는 현상에 대해 취업난이 학력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는 분석도 나온다. 예전에 ‘텔러’(teller·금전출납원)로 불리는 창구직은 여고나 전문대를 나온 젊은 여성들이 지원하는 일자리였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연봉은 2천3백만원(인사고과 B등급 기준)쯤 되지만 정규직원과 같은 대접을 받고 정년까지 보장되는 점이 고학력자들의 입맛을 당긴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볼 때 취업대란으로 인해 경직된 노동 시장은 우리 경제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얼마 전 나온 ‘가장 7명 중 1명꼴로 백수’라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주 원인은 건설업·자영업 부진에 따른 일자리 포기다. 지난해 전국 가구 중 가구주가 직업을 갖지 못한 ‘무직 가구’ 비율은 14.57%로 2005년보다 0.55% 포인트 늘었다. 관련 통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2003년 이후 최고치다. 무직 가구 비율은 2004년에 13.40%로 약간 떨어졌다가 2005년(14.02%) 이후 다시 뛰었다. 무직 가구의 소득 중 절반은 정부 보조금이나 자녀가 부모에게 준 돈 등 ‘이전 소득’이 차지했다. 스스로 벌지 못해 국가나 자녀 등에게서 돈을 얻어 살아온 셈이다.
한 경제 전문가는 “일자리 찾기를 포기한 ‘구직 단념자’가 늘어나면서 무직 가구주가 많아졌고 이들 중 상당수는 구직 활동을 안 해 실업자로도 분류되지 않는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책은 부동산 정책과 일자리 창출 실패이다”라며 “새 대통령은 설 땅이 없는 청년 백수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올인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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