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 한류' 파고 높아진다
  • 서종수(자유기고가) ()
  • 승인 2007.03.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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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국제 유통 규모 빠르게 커져...국제통화 등극은 아직 먼 길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요즘 한 달 중 보름 이상을 외국에서 보낸다. 인도·중국 시장에서 거점을 확보한 그는 최근 유럽 시장으로 눈을 돌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올여름이면 영국 런던에 자산 운용사를 설립하고 하반기에는 선진 증시에 투자하는 글로벌 펀드도 내놓을 생각이다. 개도국이나 ‘친디아’(중국+인도) 등 신흥 시장 위주였던 투자 대상을 세계 금융시장의 심장부까지 넓히는 것이다.
박회장의 행보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음을 웅변해주고 있다. 아직은 골드만삭스·메릴린치 같은 금융 거물에 견줄 정도는 아니지만 이들 앞에 도전장을 내밀 날도 멀지 않았다.
박회장처럼 세계 금융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한국의 ‘금융 전사’는 수없이 많다. 이들이 싸울 무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바로 원화 강세이다.
원화 값이 오르면서 정부가 해외 투자 규제를 완화하자 한국 투자자들이 돈 보따리를 싸들고 해외 원정길에 나서고 있다.
한국 투자자들은 돈만 된다면 대상을 마다하지 않는다. 주식 투자뿐 아니라, 땅을 사서 개발하거나 유전 개발에 돈을 대기도 한다. 투자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곳에는 금융 인프라를 깔아줘 장기적인 투자 교두보로 삼는다. 리비아의 석유, 몽골의 금광, 동유럽의 고철,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 태국의 부실 채권 등 쇼핑 목록도 갈수록 다양하고 두둑해지고 있다.
이제 한국은 만성적인 자본 수입국에서 자본 수출국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중문화의 힘으로 한류(韓流)를 만들어냈다면 이제는 원화의 힘으로 ‘머니 한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엔화의 막강한 파워를 앞세운 일본도 전세계를 휩쓸고 다니며 금융 자산과 부동산 사재기에 열을 올렸었다.
전문가들은 “해외 투자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원화 강세 추세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원화의 국제화와 국내 기업의 글로벌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한국계 자금이 베트남 증시 호황 견인


지난 1월 말 현재 국내에서 조성된 해외 투자 펀드에 몰린 돈은 18조7천억원. 2002년 말 2조1천억원의 9배에 달한다. 올 2월 들어 해외 주식형 펀드에만 1조2천8백억원이 새로 설정되었다. 같은 기간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는 1조9천6백억원이 빠져나갔다. 올 들어 신흥 증시가 호황을 누린 반면 국내 증시는 상대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한 데 따른 결과이다. 이같은 해외 펀드로의 쏠림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원화 파워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은 베트남이다. 지난해 베트남에 들어간 외국인 투자 자금의 35%가 한국계 자금이었다. 2005년의 5배 수준이다. 최근 베트남 증시 호황을 이끈 견인차가 한국계 자금이다. 인근 캄보디아에서도 한국은 최대 외국인 투자자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택 경기 둔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부동산 매입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지난해 한국인들이 구입한 미국의 주거용 부동산은 20억 달러(약 1조8천7백억원)에 달했다. 2005년의 12억7천만 달러에 비해 58%나 늘어난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주변에서는 현재 1천5백여 채의 콘도 건설이 추진 중인데, 한국인 투자자를 겨냥해 대부분 한국의 아파트를 모방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투자의 오지로 여겨지던 하얼빈까지 한국인들의 손길이 뻗치고 있다. 동토의 땅인 이곳으로 미국과 유럽 자금은 진출할 꿈도 못 꾸지만, 한국계 자금은 벌써부터 부동산을 비롯해 원유·목재 등 천연 자원 투자에 적극 나서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원화 강세 속에 해외 투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원화의 국제 유통 규모도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원화의 유통 규모는 과거 엔화 강세 때 일본 돈이 유통되던 것에 비교할 만큼은 아니지만, 2000년 이후 국제 통화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쓰레기 취급받던 것과는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시중은행들이 원화를 해외에 내보낸 (수출)규모는 2002년 5백14억원, 2003년 5백94억원, 2004년 1천1백42억원에 이어 2005년에는 1천2백억원대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수입도 2002년 43억원, 2003년 72억원, 2004년 2백77억원, 2005년 3백50억원으로 급증 추세에 있다.
한은 관계자는 “원화의 주요 수출국은 중국·일본·홍콩·미국·싱가포르 등이며 수요가 많은 중국과 홍콩의 경우 환전 브로커들이 미국 은행 등을 통해 원화를 구매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원화의 국제 수요가 증가하면서 중국은 올해부터 현지에서 원화를 위안화로 환전하도록 허용했다. 몽골의 호텔과 주요 백화점에서는 원화가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고, 태국·베트남 등 동남아 주요 관광지에서는 한국 돈으로 팁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1만원짜리를 가져가면 현지인들이 거슬러준다.
관광객들 처지에서는 원화에서 달러 또는 현지 통화로 환전하면서 날리는 수수료 손해를 줄일 수 있다. 일본 후쿠오카 시는 원화를 쓸 수 있는 특구를 설치하려고 한다. 다른 데는 몰라도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만은 원화가 ‘강한 통화’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 초에는 삼성중공업이 선박 수주 대금 4억 달러를 달러가 아닌 원화로 받는 원화 결제 시대를 열어 눈길을 끌었다. 원화 결제는 환율 급변동에 따른 수익 불안정이 근원적으로 해소됨은 물론 거액의 달러 결제 자금 환전에 의한 외환시장의 일시 왜곡 현상을 크게 줄이는 이점이 있다.


원화로 결제되는 무역 대금은 0.2%에 불과


그렇다면 원화가 달러화나 엔화처럼 명실상부한 국제통화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 답은 ‘아직은 멀었다’이다. 상당 부분의 국제무역과 자본 거래가 원화로 결제되고 또 많은 국가들이 부의 축적 수단으로 활용해야 국제통화로 인정받게 된다.
전세계 무역 거래의 45%는 미국 달러로 결제되고 유로화 결제 비율도 약 20%나 된다. 일본 엔화와 영국 파운드화도 각각 11%, 7%를 차지하고 있다. 각국의 중앙은행이 준비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는 통화 비중은 미국 달러 65%, 유로화 15%, 엔화 5% 순이다. 이들 통화가 바로 국제통화이다.
반면 원화의 현실은 참담하다. 우리나라의 대외 무역 거래에서 원화로 결제되는 비중은 전체의 0.2%에 불과하고 무역외 거래도 0.3%에 그치고 있다. 이는 전세계 무역의 0.007%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국제 외환시장에서도 미국 달러화는 ‘황제 통화’,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 엔화는 ‘귀족 통화’, 영국 파운드화는 ‘엘리트 통화’, 한국의 원화는 ‘평민 통화’로 각각 분류된다. 평민 통화 밑에는  ‘준통화’ ‘유사 통화’ 등 열등 통화가 적지 않아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무역 규모가 세계 11·12위인 것을 감안하면 원화가 그에 걸맞은 행세를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다행히 최근 원화 강세를 바탕으로 해외 투자가 크게 늘어나고 원고(高) 추세도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어 원화 국제화의 환경은 그런 대로 무르익고 있다. 여기에 정부가 지난해 외국 은행에 대해 원화 환전 업무를 자유화하고, 환전용 원화 수출입 규제 완화를 내용으로 한 외국환거래규정 개정안이 시행에 들어갔으며, 올해 들어서는 고액권 발행도 서두르고 있어 원화 거래 활성화의 여건은 마련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원화의 국제화는 여러 모로 경제에 순기능 역할을 한다. 우선 환율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다.
1990년대 말 일본이 아시아 금융 위기를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은 엔화의 국제화 덕이었다. 또 해외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도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환차손 부담이 줄고 자금 순환이 원활해지면서 기업 활동과 금융기관들의 영업이 크게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발판으로 점점 세를 확장해가고 있는 ‘머니 한류’의 첨병들. 평민 통화에 머물고 있는 원화가 엘리트 통화, 나아가 귀족 통화의 반열에 오르느냐의 여부가 이들의 어깨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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