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리건은 포악한 패션 리더
  • JES ()
  • 승인 2007.03.05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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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0년간 최신 명품 입고 '난동'...프라다, 버버리가 인기 브랜드

 
험악한 인상·스킨 헤드·신나치 패션. ‘훌리건’(Hooligan)이라는 말을 접할 때 쉽사리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다. 하지만 이같은 본능적 연상 작용은 반공 정책이 서슬 퍼렇던 시절 간첩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뿔 달린 늑대쯤으로 생각되었던 세뇌적 연상 작용과 비슷한 오류다.
한동안 잠잠하던 축구 경기장 폭력이 최근 전세계적으로 되살아나면서 조직화한 축구 폭력 집단인 훌리건에 대한 관심이 새삼스레 증폭되고 있다. 신성한 스포츠의 세계에서 온갖 악행을 일삼고 있는 훌리건은 그리 단순한 조직이 아니다. 사회·역사 조건에 따라 꾸준히 진화해온 것이 바로 훌리건이다.
축구는 공을 들고 뛰며 차는 럭비와 뿌리를 같이한다. 원형에 더 가까운 쪽이 럭비요, 규칙을 복잡하고 세련되게 바꾼 쪽이 축구다. 그런데 그 세련됨이 축구를 즐기는 계층의 성격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옛것을 존중하는 보수적 귀족이나 신흥 부르주아들은 19세기 중반 축구가 분화한 이후에도 럭비를 즐겼다. 럭비는 영국이 만들어낸 테니스·크리켓과 함께 지금까지 중산층이 즐기는 스포츠로 남아 있다.
반면 손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며 박진감을 강조한 축구는 하층 노동 계층으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자연스레 하층 계급의 자유분방함과 아울러 폭력성까지 스며들었다. 경기장 폭력 사태는 축구가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춘 19세기 후반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폭력을 위한 조직인 훌리건과 달리 원정팀의 과격한 플레이나 심판의 부적절한 판정에 대응한 우발적 사태였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축구는 유럽에서 중산층까지 파고들며 최고의 스포츠로 우뚝 섰다. 관중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경기장 폭력 사건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런데 1950년대 말 생각지도 않은 남미에서의 축구 소요 사태가 유럽을 자극했다. 축구로 해가 뜨고 지는 남미에서 연달아 과격한 팬들의 폭력 사태가 전파를 타고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잠자던 축구 폭력의 본능이 유럽에서 다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는 전후 잘 나가던 경제가 주춤한 데다 제3 세계로부터 이민이 늘어나면서 실업률도 서서히 증가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 축구장은 하층민들이 경제적 위기감을 털어내는 해방구였다.


훌리건이 ‘캐주얼 문화’ 선도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지만 의외로 서로 가까이 있다. 하층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축구가 중산층의 사랑을 받으면서 관중석의 모습은 한층 세련된 모습으로 변했다. 1980년대 유럽 무대 최강으로 군림한 리버풀의 활약은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물론 훌리건의 패션까지 바꿔놓았다.
유럽의 나라별 클럽 대항전에 참가하기 위해 유럽 대륙을 누빈 리버풀을 따라다닌 잉글랜드 팬들은 대륙의 패션에 눈을 뜬다. 특히 시내 한가운데에서 홈팬들과 벌인 폭력 사태 도중 상가 점포들에서 훔친 최신 유행 의상과 접하면서 ‘캐주얼 문화’가 탄생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다소 후줄근한 패션이었던 잉글랜드 훌리건들은 우리가 잘 아는 스포츠·캐주얼 패션을 선호하는 기호로 변신한다. 잉글랜드에서는 1980년대 훌리건을 지칭해 ‘캐주얼 훌리건’이라고 부른다.
캐주얼 바람은 명품으로 번졌다. ‘된장녀’ 논란까지 일고 있는 요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좋아하는 이탈리아·프랑스의 명품 브랜드를 훌리건이 선호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프라다나 자국 브랜드인 버버리는 훌리건들이 특히 좋아하는 브랜드로 통한다. 하지만 명품 제조업체들이 이들을 보는 눈은 곱지 않다. 훌리건이 좋아하는 브랜드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는 데다 훌리건들이 제작 의도와는 다르게 의도적으로 ‘싼 티’ 나게 입고 다니기 때문이다. 프라다나 버버리는 훌리건들이 좋아하는 일부 상품의 생산을 중단하는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10대 훌리건이 늘어난 2000년대 들어서는 ‘차브(Chave)’ 패션의 경향이 뚜렷하다. 차브란 ‘농촌 하층 계급 출신의 일탈 청소년’을 지칭하는 말로 야구 모자·슬리퍼를 비롯해 속칭 ‘추리닝’ 같은 볼품없는 아이템에 싸구려 느낌이 강한 커다란 금붙이를 치렁치렁 걸치고 다니는 스타일을 말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패션의 새 트렌드로 자리 잡은 이 스타일은 패션의 근엄함을 거부하는 싸구려 패션이었으나 최근 ‘젊고 발랄함’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어필하면서 제도권 패션으로 진입했다. 
이처럼 훌리건은 최근 20년 사이 당대 최신 패션과 함께 하고 있다. 활동을 단속하는 경찰의 눈을 좀더 쉽게 피할 수 있는 점은 패션 변화를 한층 가속화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훌리건의 원조였던 잉글랜드의 폭력 사태가 최근 잠잠해지고 있는 반면 이탈리아의 경기장 폭력 사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39명이 숨진 헤이젤 참사와 98명이 목숨을 잃은 힐즈버러 참사를 겪은 잉글랜드의 대처 정부는 당시 경제 불황기 파업 진압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경기장 관전법’을 강력히 발효해 개개인까지 추적하는 방식으로 훌리건의 싹을 잘라나갔다.
반면 이탈리아의 대응은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오랜 기간 좌우 대립과 군사정권의 통치 역사가 길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자생적 비밀 조직에 대해 관대한 전통이 남아 있었다. 축구장에서 정치적 구호가 흘러나와도 경찰의 대응은 미약했다. 경기장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적 구호나 이탈리아 반도의 남북 경제 격차를 성토하는 지역 감정식 구호는 다른 관중에게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이기도 했다.
하지만 으레 생겼다 사라지는 민간 운동 조직쯤으로 여겨진 이탈리아의 ‘울트라 조직’(이탈리아의 과격 팬클럽은 대부분 클럽 명칭에 ‘울트라’라는 단어를 씀)은 결국 응원이 아니라 폭력이 목적인 조직으로 밝혀지면서 경찰의 대대적 단속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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