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한류'에 마침표는 없다
  • JES ()
  • 승인 2007.03.0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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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선수들, J리그에서 맹활약

지난 2월15일 일본 축구계가 소란스러웠다. J리그(일본 프로축구)에서 기대주로 각광받던 재일동포 3세 이충성(일본명:리 다다나리·22·가시와 소속)이 일본으로 국적을 변경해 일본 올림픽대표팀에 발탁되자 일본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전통적으로 올림픽 경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본은 올림픽대표팀에 성인 대표팀 못지않은 투자와 관심을 쏟는다.
이충성의 올림픽대표팀 발탁은 귀화에 관대한 일본 사회의 특성 위에 일제 강점기부터 실력을 과시해온 ‘축구 한류’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한 사건이었다.
1992년 J리그가 출범하면서 홍명보·황선홍·유상철 등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들이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J리그 러시가 이어졌다. J리그 개척자 노정윤을 시작으로 2005년 최용수까지, 한국 선수들은 일본 축구에서 한류의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일본 경제의 장기 불황에 따른 몸값 현실화, 그와 동시에 진행된 K리그의 몸값 폭등, 그리고 유럽 진출 붐이 일면서 J리그에서 한류 바람은 사그라졌다.
하지만 이 바람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일본에서 나고 자란 교포 선수들이다. 이들은 광복 이후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재일 한국 축구의 전통을 이어받아 최근 일본 축구의 최고 무대로 속속 진출하고 있다. 특히 지난 시즌 소속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킨 공신들이 많아 올시즌 J리그에서 볼만한 맞대결이 예고된다.
동포 학교, 일본 고교 축구 최강으로 군림


이충성은 물론 요코하마 FC의 정용대와 빗셀 고베의 1부 리그 승격 주역인 박강조 등은 교포 선수 중 간판이다. 이 밖에도 북한 대표로 활약했던 이한재(히로시마)는 어린 나이에 프로로 데뷔해 완전히 터를 잡았다. 김기수(미토)·김영기(쇼난)·강현수(교토) 등 2부 리그에서 비상을 노리는 유망주 등 총 10여 명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이던 1935년, 식민지 조선의 최강팀 경성축구단은 도쿄에서 열린 전일본 종합 축구선수권대회와 메이지진구대회를 잇달아 제패한다.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울분을 잠시나마 풀어준 일이었다. 축구는 광복 후 일본에서 온갖 차별을 당해온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구심점이 되었고, 일본인보다 우월함을 확인할 수 있는 청량제 구실을 했다.
일본 각지의 한국 학교는 동포 축구의 요람이자 일본 내 학원 축구의 최강으로 군림했다. 일본 축구협회 등록을 거부해 전국 대회 출전이 불가능했던 시절 도쿄 조선고가 당시 전국 대회에서 우승했던 일본 학교를 3-0으로 완파한 사실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지난해 오사카의 조선 학교가 전국 대회 3위에 오르는 등 일본 내 축구 한류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축구 한류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일본어 수업 거부로 문부과학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재정난에 빠지면서 입학생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일찌감치 귀화하는 동포들도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북한 대표팀 발탁이 최고의 영예였던 교포 축구는 이러한 불투명한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 J리그·K리그·한국 대표팀 진출 쪽으로 적극 선회하는 새 패러다임 속에서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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