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에게 우울증은 ‘필연’
  • 노진섭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4.3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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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 중 1명이 앓는 심각한 상황…임신·출산·갱년기·폭행·성 차별 등 원인 다양

"전화 통화할 때만 해도 밝은 목소리였는데…. 우울증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김 아무개씨와 안부 통화를 한 지인은 김씨의 갑작스러운 자살을 믿을 수 없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2주 전 여섯 살짜리 아들과 남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 퇴근하는 남편에게 유치원에 들러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남긴 그녀는 현관문을 걸어 잠근 채 먹어서는 안 될 약을 삼켰다. 가정에 문제가 있거나 경제적 압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녀가 세상을 등진 이유는 바로 우울증 때문이었다. 그녀를 아는 지인들은 김씨가 최근 몇 달 동안 심각한 우울증을 호소해왔으며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씨의 경우처럼 우울증은 극단적인 결말을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우울증은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는 병이다. 그럼에도 정신병이라는 사회적 편견으로 치료 시기를 놓치거나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의 전준희 위기관리팀장은 “우울증은 정신분열증과 달리 치료도 잘되는 병인데 사회적 편견 때문에 치료 시기를 놓쳐 되돌릴 수 없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산모 80%가 ‘우울감’ 경험”


 
여성 2명 중 1명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서울시 광역정신보건센터가 지난해 서울시 남녀 1천3백20명을 대상으로 우울증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 9백34명 가운데 우울증을 호소한 사람은 전체의 45.7%로 나타났다. 남성 36.1%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치이다.
생리적 변화를 경험해야 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우울증에 시달리기가 쉽다.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여성에게 나타나는 생리적 변화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임신·출산·갱년기·자궁 수술 등이다. 임신과 출산 전후 많은 여성이 우울증을 호소한다고 한다. 수원 생명의전화 강용 원장은 “산모의 80%가 우울감에 빠지고 이 중 10~15%가 우울증으로 접어든다. 또 이 중에서 심한 경우는 더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발전한다. 아이와 함께 자살하는 엄마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라고 말했다.
박소영씨는 3년 전 심한 산후 우울증을 경험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박씨는 “아이를 낳은 후 3년쯤 되니까 원인 모를 공허함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져 한 6개월 고생했다”라고 말했다. 결혼과 출산으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기 때문에 더 할 일이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또 결혼 전 생각했던 핑크빛 신혼 생활도 지나고 남은 것이라고는 아이를 키우며 이른바 ‘부엌데기’가 되어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뿐이었다. 아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외출도 자유롭지 않았다. 택배 직원이나 우체부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외부 사람이었다. 박씨는 “하루에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제외하면 택배 직원이나 우체부였다. 제품을 건네받는 짧은 순간이지만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온라인 쇼핑을 즐기는 버릇이 생겼고 남편 모르게 마이너스 통장까지 개설하면서까지 물건을 사들였다. 다행스럽게도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우울증을 털어낼 수 있었지만 박씨에게는 현재 1천만원이 넘는 빚이 남아 있다.
여성이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성 차별과 폭행이다. 남성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큰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작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삭이는 여성이 많다. 이 경우 분노가 쌓여 화병이나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또 남편이나 부모의 폭행으로 인한 우울증을 호소하는 여성도 있다.
40대 주부 이 아무개씨는 남편의 폭행과 강압에 못 이겨 아예 입을 닫고 산 지 7년. 결국 우울증이 심해질 대로 심해진 이씨가 지인의 도움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빠진 후였다. 병원에서 심리 검사와 신체 검사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소심한 성격이 우울증 키우기도


 
또 다른 이 아무개씨는 상태가 더 심각하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리다 20세 때 가출했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중 한 남성으로부터 성폭행까지 당했다. 어쩌다 그 남자와 결혼까지 하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가출을 했지만 남편마저 자신에게 폭행을 일삼자 결국 이혼했다. 하지만 이씨의 우울증이 가시지는 않았다. 현재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씨는 구멍이 숭숭 뚫린 하트를 칼로 찌르는 그림을 그렸다. 폭행에 대한 앙갚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외부 환경 때문에 우울증을 겪는 여성도 많다. 가정이나 회사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원만한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30대의 한 여성은 가정과 직장에서 복합적인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녀는 열악한 가정 환경에서 자기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이 강박관념은 회사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업무에 서투르다 보니 자주 실수를 저질렀고 자신은 패배주의자라는 인식이 머리에 각인되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직장 동료와 상사로부터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회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직장을 여러 번 옮겨야만 했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또 실수하면 끝장’이라는 압박감 때문에 우울증 증상이 더욱 악화되었다. 사내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나타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기도 했다. 이른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학원 강사로 일하는 30대의 한 여성도 가정 불화로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때문에 가정에 문제가 생기자 집중력이 떨어져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학원에 불만을 제기해 결국 여러 차례 직장을 옮긴 그녀는 또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
사랑을 받지 못해 우울증에 빠지는 여성도 있다. 20대의 한 여성은 8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다. 부모의 부부 싸움을 지켜보며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부모가 최근 이혼하자 우울증 증세가 극에 달했다. 자살 시도도 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에 변화가 생긴다. 이런 내가 싫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감정의 기복이 심한 조울증에 해당한다는 것이 전문가의 조언이다. 그녀는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다고 했다. 그는 “병원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나 수군대는 소리 때문에 병원에 갈 수가 없다. 또 한 번 치료에 12만원이나 하니 치료받는 것도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여성의 소심한 성격이 우울증을 증폭시키는 경우도 있다. 미혼의 한 여성은 주변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성격 때문에 대인 관계가 좋지 않은데 그나마 싫은 소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더욱 멀리할까 봐 두렵다. 이 여성은 이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늘 혼자이고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우울증에 걸리는 비율이 두 배 정도 높다고 한다. 우울증은 감정 변화가 심한 병인 만큼 정신적으로 남성보다 섬세한 여성이 걸리기 쉽다. 전문가들은 사회적 스트레스에 의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성도 적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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