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대들보' 반도체 기우는가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5.07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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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반도체 산업이 위기를 맞았다. 주력 상품인 메모리 반도체의 가격 하락이 폭락 수준이다. 공급량이 넘쳐 빚어진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또다시 모험을 감행했다. 불황기에 공장을 증설하고 투자를 대폭 늘렸다. ‘위기는 기회’라는 논리에 승부수를 던졌다. 이참에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산업 구조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반도체 업체들의 생존 전략과 시장 전망을 살펴보았다.

초고속 질주를 해오던 국내 반도체 산업에 급제동이 걸렸다.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면서 ‘위기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주력 상품은 D램과 낸드 플래시 등으로 대변되는 메모리 반도체이다. 올해 들어 이 대표 상품들이 맥을 못 추고 있다. 하늘 높이 치솟던 가격이 수직 하락하고 있다.
D램(DDR2 512메가바이트 기준) 가격은 지난해 12월 6.57달러에서 올해 1월에는 5.16달러로 떨어졌다. 불과 한 달 사이에 1.41달러가 떨어진 것이다. 3월에는 3.58달러로 급락했다. 낸드 플래시(4기가바이트 기준)도 마찬가지이다. 지난해 12월의 6.66달러에서 올해 2월에는 3.69달러로 수직 하락세를 보였다. 3월부터는 오름세를 보이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D램은 PC의 계절적인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상태인데도 업체들이 D램 생산을 늘리면서 가격이 폭락했다. 수요와 공급이 어긋난 것이다. 그만큼 반도체 시장이 어렵다는 것을 증명한다.
업계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메모리 부문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삼성전자도 가격 폭락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지난 1분기에는 4년 만에 최저 실적을 기록했다. 매출이나 영업이익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이닉스반도체 역시 시장 기대에 못 미치는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반도체 경기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기적으로 부침을 거듭했다. 보통 4년 주기를 갖고 있다. 이런 반도체 경기의 순환을 ‘실리콘 사이클’이라고도 부른다. 1995년에 성장이 주춤하다가 2001년도에 잠시 침체기를 맞았다. 그 후 이내 상승 곡선을 그렸다. 애널리스트들은 반도체 시장에 ‘더 이상의 불황은 없다’ ‘실리콘 사이클은 끝났다’고 선언할 정도로 반도체 시장을 낙관했다.
이러한 장밋빛 환상은 얼마 가지 못했다. 최근 가격이 급락하면서 ‘실리콘 사이클’의 망령이 되살아났다. 한국 경제의 돈줄인 반도체 산업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상 조짐에 따라 ‘반도체 경기의 추락’이 염려되고 있다.

 

“하반기 회복” “가격 하락세 지속” 전망 엇갈려


 
반도체 가격 하락에 대한 전망은 엇갈리게 나온다. 업계에서는 오는 6월을 기점으로 하반기에는 점차 회복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에 반해 학계에서는 가격 하락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공급 과잉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반도체 업계는 하반기는 1분기와는 사뭇 다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새로운 모바일 기기의 잇따른 출현으로 수요가 대폭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애플의 아이폰을 비롯해 뮤직폰, 내비게이션, 대용량 게임기 등 신제품들이 쏟아지면서 플래시 수요가 넘쳐날 것으로 점쳤다. 송명섭 CJ투자증권 연구원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5월 말에서 6월께에는 바닥을 탈출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반도체 주가도 부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반도체 제조 업체들은 위기 상황을 기회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오히려 태연하다. 현재 상황을 절대 위기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기회라는 시각을 가지고, 예정된 투자를 진행하면서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술적 우위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지도 엿보인다. 수요와 공급에 따른 가격 등락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상황만 잘 넘기면 시장 지배력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지금까지 반도체 경기 사이클에서 일본 기업과 국내 기업은 상반된 투자를 해왔다. 일본 반도체 업계가 생산 라인을 멈추고 투자에 소극적일 때 한국 기업은 투자를 더 늘렸다. 공장을 신축하거나 증축하고 생산 라인을 더 확장했다. 이러한 투자 전략은 적중했고, 일본 업체들을 앞서는 원동력이 되었다.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도 ‘적기 투자’와 ‘앞선 투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확실한 기술적 우위’를 강조했다. 황사장은 최근 일본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반도체 시장은 수많은 업체가 경쟁적으로 물량을 쏟아내 가격 폭락을 자초하고 있다. 스스로의 수익성을 갉아먹는 구조이다. 5년 후쯤에는 큰 지각 변동이 온다. 확실한 기술력을 가진 업체만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다수 업체들은 도태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김종갑 사장이 취임하면서 3년, 5년으로 나누어 경영 로드맵을 짜고 있다. 2009년까지 4조5천억원을 투자해 세계 3위로 올라서겠다는 성장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내년 4월까지 청주에 3백mm 웨이퍼 생산 공장을 건설한다. 총 투자비만 3조8천억원에 달한다. 청주 공장은 40나노급 낸드 플래시 제품을 집중 생산한다. 내년 하반기에 가동하면 하이닉스는 세계적인 반도체 전문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중국 우시 공장의 12인치 D램 라인 생산량도 더욱 늘릴 계획이다. 반도체 경기 침체 속에서 던지는 승부수인 셈이다.
김종갑 사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반도체 업계의 구조 조정을 예견했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는 업체는 자연스럽게 구조 조정이 된다. 이 위기만 이겨내면 나중에는 더욱 좋은 상황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위기를 기회로’라는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전략이 이번에도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 구조가 메모리에 편중되어 수요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메모리 사업 분야로 다변화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강점인 D램은 이제 성장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D램은 해외 시장 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경기의 부침이 심하다. 비메모리의 기술 개발을 조속히 이루지 못하면 반도체 수입국으로 밀려날 우려마저 있다.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기초 기술과 설계 기술이 선진국에 비해 매우 뒤떨어져 있다. 설계 기술의 전문 인력 양성이 미흡해 비메모리 부문의 기술 수준이 전반적으로 저하되어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수년 전부터 비메모리 산업의 효율적인 균형 발전을 외쳐왔다. 실제로 비메모리 육성 방안을 추진해왔으나 성과는 미미하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발간한 <반도체 산업의 2020 비전과 전략>이라는 보고서에서 “과거 반도체 시장을 견인했던 PC나 서버는 주로 기업이 구매자였지만, 최근에는 개인용 디지털 가전이나 휴대전화기가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반도체를 소비하는 유저가 기업에서 개인으로 크게 변화한 것이 저가격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 “앞으로 반도체 산업은 1985~ 1995년의 평균 20%대로 성장하던 시대와는 달리 한 자릿수로 성장하게 되고, 결국 새로운 시장 창출이 가능한 한정된 기업만 생존할 것이다. 2010년 이후에는 반도체 산업이 커다란 전환기를 맞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중·타이완 손잡고 삼성전자 집중 공격


 
반도체 장비업체는 반도체 가격 하락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설비 투자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1분기 실적이 이를 말해준다. 주성엔지니어링을 비롯한 장비업체들 다수의 영업이익률이 최고치를 기록했다. 해외 수주가 늘어난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장비 업체들의 시급한 과제는 기술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반도체 장비의 약 80%, 재료의 60% 정도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반도체 장비나 재료 기술은 초정밀·초순도 기술 등 극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아직은 기술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반도체 장비 업체를 지원하기 위한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은 지난 2월 ‘반도체 장비 표준화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반도체 제조 장비와 재료 부문의 지원이 골자다. 크게는 반도체 장비의 해외 의존도를 줄이고 국산화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이다.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학생, 중소기업인, 퇴직 전문가 등을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반도체 가격 하락은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반도체 시장도 불황 일색이다. 공급이 넘쳐나 성장률의 둔화가 뚜렷하다. 올해 성장률도 한 자릿수에 머무를 것으로 전망된다.
D램 가격의 폭락은 자연스러운 구조 조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요나 필립스 등은 반도체 부문 매각을 진행 중이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생산 라인을 세우고, 새로운 팹(FAB) 건설을 잇달아 연기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종합 반도체 회사들 가운데 기술력과 경쟁력이 뒷받침된 극소수만 살아남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부동의 1위 기업 삼성전자는 국내외 업체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다. 특히 일본과 타이완 업체들은 연합전선을 펴며 삼성전자를 압박하고 있다. 일본의 D램 생산 업체들은 합병한 후 엘피다를 만들었다. 이 업체는 최근 경쟁사인 타이완의 파워칩과 손잡고 1조6천억원을 투자해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이다. 파워칩은 일본 르네사스 사와도 제휴해 중국에 디지털 가전용 비메모리 반도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타이완의 난야도 독일 키몬다와 신제품 공동 개발에 들어가는 등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이 타이완·중국 등과 삼각 편대를 형성해 삼성전자를 공략하는 형국이다.
또 중국과 타이완은 우리나라의 첨단 반도체 기밀을 빼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미 여러 경로에 걸쳐 실제 영업 기밀을 빼내가기도 했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연구센터도 중국과 일본의 산업 스파이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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