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장, ‘다크 사이클’에 잠기나
  • 서종수(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5.0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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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 성장률 둔화 역력…업체들, 생존 위해 ‘적과의 동침’도

 
전세계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고된 시련을 겪고 있다. 올 초만 해도 12년 만에 최대 호황기를 뜻하는 ‘슈퍼 사이클’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온데간데없이 지금은 잿빛 일색이다. 일각에서는 불황이 계속 깊어지는 ‘다크 사이클’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올해 반도체 산업은 8% 이하의 한 자릿수 성장에 그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이는 올해를 변곡점으로 2008년까지 연 8~30%씩 성장할 것이라던 지난해 말의 전망치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그만큼 침체의 골이 예상보다 훨씬 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최근의 반도체 경기 부진은 계절적 요인이 겹친 탓도 있어 2분기에는 나아지겠지만 공급 과잉이 워낙 구조적이어서 ‘반짝세’에 그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세계적 반도체 조사 기관인 아이서플라이는 올해 전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지난해 2천6백2억 달러보다 8.1% 늘어나는 데 그친 2천8백14억 달러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직전에 내놓았던 성장 예상률 10.5%를 2.4%포인트 낮춰 수정한 것이다. IC인사이트도 반도체 시장 예상 성장률을 기존 7%에서 2%포인트 낮춰 잡았다. 세미코리서치는 시장 성장률을 올 초 5.8%로 낮춘 데 이어 다시 1.8%로 내렸다.
아이서플라이측은 “지난해 4분기 말에 갑자기 반도체 최종 소비자 시장의 약세가 나타나면서 올 들어 공급 과잉이 심화됐고 휴대전화 시장의 부진이 더해져 반도체 시장 전망의 낙관론이 퇴조했다”라고 말했다.
가장 죽을 쑨 것은 D램 등 메모리 분야이다. 아이서플라이가 반도체 시장 전망을 재조정한 배경도 바로 D램 매출의 감소 때문이다. D램 시장은 2006년에 전년 대비 35.2% 성장한 3백39억 달러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는데 올해에는 3백69억 달러로 8.6%의 저성장에 머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매출 감소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공급 증가로 인해 평균 판매 가격(ASP)이 급락한 것이다. 이는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이익이 적은 낸드 플래시에서 벗어나 D램으로 생산 라인을 전환하는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메모리 칩 가격이 올해 최대 40%나 급락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아 시장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했다.
아이서플라이는 D램 2백56메가바이트의 ASP가 올해 2달러, 2008년에 1.46달러까지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았다. 게다가 전체 플래시 시장이 지난해 11.1% 성장에서 올해에는 3.3% 하락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낸드 플래시의 경우 용량 구분 없이 올해 ASP가 5.7달러로 지난해 11월의 7.9달러보다 2.2달러나 떨어질 것으로 예측되었다. 이쯤 되면 ‘시장의 재앙’이라는 표현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이런 가운데 올 1분기 반도체 업체들은 형편없는 영업 성적표를 발표했다. 미국의 비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AMD는 지난 1분기 순손실 규모가 6억1천1백만 달러에 달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1억8천5백만 달러 순이익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13억3천만 달러였던 매출도 12억3천만 달러로 7.4% 감소했다.
미국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테크놀로지도 D램 가격 하락과 비용 증가로 지난 1분기 3백만 달러의 영업 손실을 기록하며 적자로 돌아섰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D램 메모리 가격이 생산 원가 수준으로 하락한 것이 실적 부진의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1위의 반도체 파운드리(전공정 위탁 제조) 업체인 타이완 TSMC는 최근 1/4분기 순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2%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TSMC는 1/4분기 순이익이 1백88억 뉴타이완 달러(미화 약 5억6천7백만 달러)로 집계되어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백26억 뉴타이완 달러보다 크게 감소했다고 밝혔다. 이는 시장 예측치인 2백7억 뉴타이완 달러를 밑도는 수치이다. 주당 순이익(EPS) 역시 지난해의 주당 1.26 뉴타이완 달러보다 감소한 0.73 뉴타이완 달러를 나타냈다. 같은 기간 매출은 작년 동기 대비 18% 줄어든 6백33억 뉴타이완 달러를 보였다. 한 시장 전문가는 “계절적 요인으로 수요가 감소한 것이다. 2분기에 수요가 증가하면 수익도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인텔은 올 1분기 17억 달러의 영업 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전분기 15억 달러에 비해 13% 증가한 것인데 장사를 잘했다기보다는 강도 높은 구조 조정 덕이었다. 실제로 지난해 실적이 뚝 떨어졌던 인텔은 전세계 10만명의 직원 중 1만5백명을 감원하기로 하고 현재까지 8천5백명의 직원을 해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업계 ‘합종연횡’ 활발…삼성전자 등 극소수만 살아남을 수도


그러나 업계 7위인 타이완의 파워칩은 삼성전자 이익률의 2배 수준인 25%를 기록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파워칩은 전 분기에도 이익률 45%를 기록하며 한국 업체들을 앞지른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파워칩이 일본 엘피다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3백mm D램 양산 능력을 크게 확대해 공세에 나선 것이 높은 이익률의 주된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의 3백mm 양산 능력이 월 18만5천 장, 하이닉스 12만 장 정도인데 파워칩이 11만 장 수준으로 바짝 뒤쫓아오고 있다고 분석한다.
불황의 그늘이 깊어짐에 따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도 치열하다. 무엇보다 부실한 사업 분야는 잘라내고 경쟁 업체와 손을 잡고 신규 시장 진출을 꾀하는 ‘합종연횡’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때로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다. 엔엑스피(NXP)반도체는 지난 2월 미국 실리콘랩을 인수하는 한편 중국 공장을 타이완 TSMC에 매각하기로 했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지난 1월 미국 아바고의 이미지 센서 사업부를 인수하기로 발표하고 휴대전화에 이어 자동차, 보안, 소비 가전, 의료 장비 등으로 이미지 센서 적용 범위를 확대해나가기로 했다.
LSI로직은 40억 달러를 투입해 아기어시스템즈를 인수해 5월 초 합병을 통해 LSI로 거듭났다. 인텔의 경우 미국 노어 플래시 사업부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인텔은 최근 ST마이크로와 공동으로 65나노 공정 노어 플래시 개발에 성공했다. 일본 산요전기는 반도체사업부 매각을 추진하면서 전세계 10여 개 기업들과 인수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합종연횡 바람 속에 과연 누가 온전하게 살아남을 것인지도 관심거리이다. 전문가들은 종합 반도체 회사들 가운데 삼성전자·인텔 등 연간 70억 달러 이상 매출을 기록하는 극소수 기업들만이 살아남고, 중상위권 기업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인수·합병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한 휴대전화 등 디지털 기기의 제품화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추세에 따라 ‘팹리스(설계 전문)’ 반도체 산업도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종합 제조회사 가운데 일부는 파운드리 사업에 나서는 등 생존을 위한 다양한 흐름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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