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문제 해법은 기본 지키기다"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5.0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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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동행(相生同行).’ (주)코오롱 구미공장 노조사무실에 걸려 있는 문구이다. 네 글자를 만들어내기까지 코오롱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노조는 64일간 파업을 했고, 회사는 5백9명을 해고시켰다. 파업 이후 남은 것은 경영 악화와 대량 해고자뿐이었다. 아직도 상흔은 곳곳에 남아 있다.
최근 코오롱 노사는 함께 살자며 손을 맞잡았다. 제2 창업에 가까운 정신으로 일하자고 약속했다. 노사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았던 순간들은 되돌리기 싫은 추억일 뿐이다.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오직 ‘회사도 살고, 나도 살겠다’는 강한 생존 의지만 있을 뿐이다.
김홍열 노조위원장과 극적 합의를 이루어낸 배영호 사장(64)은 “미래를 보고 함께 살자”고 강조한다. 노사가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배사장에 대한 코오롱 종업원들의 신뢰도는 거의 100%에 가깝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경영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신뢰한다. 배사장은 그룹 내에서는 ‘미다스 손’으로 불린다. 그가 가는 곳마다 적자가 흑자로 바뀌었다.
노조는 한때 64일간이나 파업했었고, 지난해에는 회장 자택을 습격하는 강경 투쟁도 했다. 당시 회사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파업이 한창일 때는 그룹 전체가 위기감이 팽배했다. 한국전쟁 때 서울이 점령되었던 상황과 비슷했을 것이다. 당시 공장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한 언론에 구미 공장 르포 기사가 나왔는데, ‘황량한 구미 공장’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라고 썼더라.
지난해와 올해 회사는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매우 달라졌다. 노사 대립을 할 때는 회사가 아니라 전쟁터였다. 산업 현장에는 선동적인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렸다. 하루 종일 노동가가 울려 퍼졌다. 일터가 아니었다. 거래처에서 오더를 주지 않았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사 간의 다툼이 있는데 어느 누가 거래를 하겠는가. 심지어 파업할 때 ‘코오롱의 제품을 사지 말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지금은 다르다. 노사가 상생에 합의한 후 생산 현장은 희망에 넘쳐 있다. 종업원들은 의욕에 가득 차 있다. 이제는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노사 상생 합의가 종업원들의 영구적인 고용 보장을 뜻하는 것인가?
지금처럼 노사가 상생하고 종업원들이 열심히 일하면 구조 조정이 필요 없다. 그렇다고 일 안 하고 농땡이를 부리면 안 된다. ‘상생’에는 ‘열심’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또 회사의 방침에 잘 따라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라면하고 우동하고 있는데, 라면이 잘 팔리고 우동이 안 팔린다고 하자. 그러면 회사는 라면에 생산 능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종업원들의 일터도 옮겨야만 할 때가 있다. 이런 때는 협조해야 한다. 구미에서 서울, 서울에서 구미를 가라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거리의 근처 사업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사원들이 결혼식 주례를 서달라고 많이 부탁해온다. 그때 한마디씩 한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하는데, 그대로 인사하면 서로 부딪친다. 신랑 신부가 한 발씩 뒤로 물러나야만 한다. 부부가 한 발씩 양보하면 오래오래 잘산다. 노사도 마찬가지이다. 회사와 노조가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있어야 오래 공존할 수 있다.
해고자들이 회사 앞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 구제 노력은 하고 있는가?
해사 행위를 한 해고자들을 복직시킬 수는 없다. 장기간의 파업으로 회사가 경영 위기를 맞았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회사가 죽어갔다. 그대로 가면 모두가 죽을 판이었다. 할 수 없이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다리가 썩어가면 다리를 잘라야 하는 것 아닌가. 해고자들 문제에 대해 이젠 해법이 없다. 지난해 사장에 취임한 후 대화를 시도했다. 해고자들은 무조건 복직을 요구했다. 이는 현실성이 없다. 대량 해고 사태 때 해당 종업원 대부분은 회사의 방침에 따라주었다. 회사로서도 가슴 아픈 일이다. 반면 해고자들은 회사의 방침을 무시했다. 지속적인 해사 행위도 했다. 회사에 많은 피해를 끼쳤다. 중앙노동위원회는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때 대화에 나섰으면 타협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노사 문제에서 회사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깨서도 안 된다. 사회 정의에도 맞지 않다.
노조의 무파업 선언에 대한 그룹 최고 경영진의 생각이 궁금하다.
속 썩이던 자식이 정신을 차려서 기쁘다고나 할까. 그룹 내에서 코오롱은 노사 분규 때문에 골칫거리였다. 갈 길이 바쁜데 발목을 잡았다. 무파업 선언 이후 예전과 달라진 모습에 만족해하고 있다.
1996년 노사 분규가 극심했을 때 구미 공장장을 맡았다. 공장장으로 부임한 후 노조와 관계가 좋았다고 하는데? 
구미 공장장 발령 당시 노조원들이 공장장실을 점거하고 있었다. 철야 농성을 하면서 기 싸움이 시작됐다. 넥타이를 풀고 신발도 벗고 양말만 신은 채 집무실로 들어갔다. ‘내 사무실에서 밤을 새울 작정이면 터놓고 얘기나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새로 부임하는 공장장의 호탕한 모습에 노조원들도 의아해했다. 그날 밤새도록 노조원들과 흉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소주 잔을 기울였다. 당시 구미 공장 사원들은 나를 ‘자전거 공장장’이라고 불렀다. 공장장을 맡고 나서 코오롱유화 사장으로 떠날 때까지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공장을 돌면서 사원들과 일일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만큼 사원들 곁에 있었다.
 
그때는 노조가 민주노총에 막 가입했을 때이다. 강성 노조를 설득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텐데.

민주노총에 가입하고 나서 노조는 강성으로 돌변했다. 민주노총에서 지시하면 동조 파업을 하는 등 너무 힘들었다. 코오롱 노사 문제로 인한 파업이 아니라 민주노총의 전략에 의한 파업이었다. 섬유업계 특성상 파업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노조와 대화에 나섰다. 종업원들 개개인과 대화를 하면서 파업 자제를 촉구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서인지 내가 공장장으로 있을 때 파업은 없었다.
사장에 취임한 후 스스로 많은 기득권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했나?
경산 공장에 사장 전용차가 있었다. 공장장 차는 오피러스인데 사장 차는 에쿠스였다. 1년에 몇 번 가지 않는데 고급차가 필요 없었다. 경산 공장에서 사장 취임식 하는 날 당장 차를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사장 몫으로 되어 있는 골프회원권 3장 중 2개를 없앴다. 사장실 규모도 줄이고 비서도 2명에서 1명으로 줄였다. 이런 식으로 열여섯 가지의 군살빼기를 했다. 회사가 돈을 잘 벌면 굳이 기득권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회사가 어려운데 사장이 모든 혜택을 누린다면 누가 따르겠는가.
회사가 어려운데도 20억원에 달하는 격려금을 지급했다. 그럴 필요가 있었나?
사장에 취임해서 보니 사원들의 사기가 너무 죽어 있었다. 우선 기를 살리는 게 중요했다. 회사를 위해 애써준 공장 직원들에게 보상이 필요했다. 이런 차원에서 2백만원씩 격려금으로 주었다. 직원들의 사기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투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내가 코오롱제약 사장을 맡았을 때도 3백여 명의 전직원들에게 1인당 100만원씩 격려금을 돌렸다. 그랬더니 그해 영업이익이 전년도보다 훨씬 좋았다. 보너스 이상의 효과가 났다. 무조건 아끼거나, 무조건 쓴다고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회사가 잘 베푼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익이 나면 되돌려주겠다는 말을 믿게 해야 한다. 사장과 종업원이 서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
재계에서는 코오롱을 배우자는 말이 많다. 지금 노사 분규를 겪거나 노사가 갈등하고 있는 회사들에게 비책을 전한다면.
특별한 비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협상술도 없다. 다만 기본을 지켰을 뿐이다. 사장은 사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신뢰를 얻어야 한다. 돈을 벌어서 준다고 해놓고 안 주면 누가 믿겠는가. 또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경영 능력이 없는 사장은 자격이 없다. 종업원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다. 무능력한 사장에게 신뢰를 보낼 종업원은 없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군데 적자 사업장을 맡아서 모두 흑자로 바꿔놓았다. 내가 구미 공장장을 할 때 사원들이 2천명 있었는데,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나간 사람은 없다. 노조도 마찬가지다. 노조위원장이 조합원들에게 신뢰가 없으면 안 된다. 노조위원장이 그만큼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장이나 노조위원장에 대한 신뢰, 그것이 노사 상생의 밑바탕이다.
구미 공장 노조사무실에는 ‘상생동행(相生同行)’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노조원들과 함께 새긴 이 글씨를 무척이나 아낀다고 들었다.
노조원들과 등반 대회를 하면서 함께 새겼다. 네 글자에 담긴 의미는 크다. ‘서로 함께’ 가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 그동안은 노사가 ‘따로따로’였다. 서로 부딪히고 싸웠다. 싸움의 상처는 깊었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다. 더 빛이 난다. 이제는 노사가 싸우지 않고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것이다. 회사와 종업원들이 함께 사는 길을 택할 것이다.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으면서 말이다. 상생동행은 노사가 함께 살겠다는 약속이다.
‘구원투수 CEO’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번에도 구원투수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는데.
인사 발령이 날 때마다 남들이 기피하는 부서에 발령이 났다. 대표로 발령이 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1998년에는 코오롱유화와 코오롱제약 두 회사의 대표를 한꺼번에 맡았다. 유화 사업은 재무 구조가 안정돼 있었지만 매출이 저조했다. 제약의 재정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적자 매출인 데다가 부채 비율은 3백63%, 차입금 비율은 2백81%에 달했다. 내가 싹 바꿔놓았다. 유화는 연평균 30%씩 매출이 성장하는 회사로 만들었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제약도 흑자로 돌려놓았다. 지난해 2백6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코오롱도 올해 1분기에는 흑자를 냈다.
적자를 흑자로 돌려놓은 것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면….
1981년 6월 일이다. 뉴욕 지사를 개설하고 돌아온 후 타이어코드 사업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타이어코드 사업은 공장 가동률이 50%가 안 되었다. 한마디로 적자투성이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적자 원인을 찾았는데, 거래처가 문제였다. 금호타이어(당시 삼양타이어) 한 군데이다 보니 그 회사가 파업하면 우리까지 죽는 구조였다.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정공법을 택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 굿이어 사를 공략 목표로 삼았다. 타깃을 정한 후 집요하게 찾아가 설득했다. 상대가 귀찮을 정도로 전화를 했다. 이런 집요한 설득이 통했던지 굿이어 사의 납품 허락을 받아냈다.
굿이어 사는 세계적인 유통망을 갖추고 있었다. 이 회사의 납품 업체라면 어디든지 통했다. 이번에는 국내 업체를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코오롱의 라이벌 회사인 효성을 뚫어보기로 했다. 효성의 형제 회사인 한국타이어를 찾아가서 ‘우리 회사 제품을 써달라’고 담판을 지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타이어 납품에 성공했다. 타이어코드 사업은 내가 부임한 후 2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단위 부서가 본부로 승격되면서 지금은 그룹의 돈줄이 되었다.
그룹 내에서는 ‘스타 CEO’란 말을 듣는다. CEO가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세련된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필요하다.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은 CEO로서 자질 부족이다. 스스로 중심이 되어 일처리를 해야 한다. 통솔력과 카리스마가 없으면 CEO가 될 수 없다. 미래를 보는 능력, 즉 선견지명은 CEO의 필수 조건이다. 5년 후, 10년 후를 못 보면 그 회사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제조업은 최소 2년 후를 내다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결단력도 꼭 갖추어야 할 자질 중의 하나이다. 적절한 시점에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담력이 약한 사람은 결정이 늦다.
언제 어디서나 최선의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다.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최악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그룹 내에서 가장 결단력이 빠르다. 내 책상에는 서류가 없다. 결제 서류를 받으면 최단 시간 내에 결단을 내린다. 그 다음에 강한 추진력과 배짱이 있어야 한다.
노사 상생으로 제2 창업을 맞았다. 앞으로 계획은?
과거보다는 적극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코오롱을 알차고 튼튼한 회사로 만들겠다. 젊은이들이 입사하고 싶은 회사로 만들겠다. 회사는 이익을 많이 내고, 종업원에게는 많이 베푸는 회사가 되겠다. 회사와 종업원이 더불어 사는 회사가 되겠다. 지켜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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