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독에 빠진 ‘곤드레 공화국’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5.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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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 성인은 1인당 소주 86병, 맥주 1백9병을 마셨다. 음주로 인한 건강 악화는 물론,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대학의 신고식이 그렇고 2, 3차로 이어지는 직장의 음주 문화가 그렇다. 최근에는 여성과 청소년의 음주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술병 걸린 한국, 치료제는 없는가.

 
"소주 한잔 하자." 성인 남자들이 가장 친근하게 건네는 말이다. ‘만나자’라는 말보다 ‘마시자’라는 말에 더 익숙하다. 술은 또 친교의 제1 순위 수단이다. 술은 적당하게 즐기면 약이지만 넘치면 독이 된다. 그런데도 한국 남자들은 약이 아닌 ‘독배’를 돌린다. ‘퍼 마신다’고 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신다. 독한 술 소비량 세계 4위라는 불명예까지 안고 있다.
대한주류공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소비된 소주는 약 31억 병(3백60㎖ 기준). 20세 이상 성인 1인당 소주 86병을 마신 꼴이다. 맥주는 지난 한 해 39억 병(5백㎖ 기준)이 출고되어 성인 한 사람당 1백9병을 마셨다. 위스키는 1.32병이다. 1인당 매달 6.91병의 소주와 9.08병의 맥주, 0.11병의 위스키를 마셨다는 계산이다.
 
술에 따른 폐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업은 술 취한 직원들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개인은 건강을 잃게 된다. 이래저래 손해이다. 사회·경제적 손실도 15조원에 달한다. GDP(국내총생산)의 2.86%를 차지할 정도다. 알코올 중독자도 2백20만명이나 된다. 살인·강간·폭행 등 강력 범죄도 대부분 술을 마신 상태에서 일어났다. 교통사고의 주요 사망 원인도 음주 운전이다. 음주 사망자도 해마다 느는 추세이다. 한 해 6만5천여 명이 암으로 숨지는 환자 가운데 간암 등 술로 인한 사망자가 40%에 이른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04년 간암 검진 수검자 7만2천9백64명을 대상으로 간암에 걸릴 가능성을 분석했다. 결과 1주일에 소주 한 병 이상을 마시는 상습 음주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간암에 걸릴 가능성이 8.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사회 문제화되고 있는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이다. 다음으로 많은 것이 알코올 중독이다. 술 중독은 우울증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우울증을 더 악화시키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술 문화는 ‘끝장 문화’로 압축된다. 2차는 기본이고 3차, 4차까지 가서 폭탄주를 돌리며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마신다.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전투를 방불케 한다. 음식을 먹을 때 술을 곁들여 마시는 반주는 기본이 되었다. 밥 대신 술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도 허다하다.

 
직장 여성 35%가 ‘필름 끊김’ 경험


해마다 입학철이 되면 대학가에서 폭탄주를 마시고 심장마비로 숨지는 사건이 생긴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술을 강권하면서 생긴 사고이다. 직장의 회식 문화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에는 회식 자리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술 마시기를 강권한 직장 상사에게 ‘인격권과 행복권을 침해’했다며 3천만원의 배상 판결이 떨어졌다. 아직도 술 강요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 판결로 눈길을 모았다.

 
최근에는 술 마시는 여성이 크게 늘고 있다. 음주 직장 여성 10명 중 3명 이상이 ‘필름 끊김(블랙아웃)’ 등 알코올 의존 초기 현상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보건복지부 지정 알코올 질환 전문 다사랑병원이 술을 마시는 20~50대 직장 여성 1백70명을 대상으로 ‘직장 여성들의 음주 행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5%가 ‘필름 끊김’을 경험했다. 34%는 월 한 차례 이상 ‘과다 음주’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응답자의 4%는 필름 끊김을 정기적으로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직장 여성의 음주 행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적어 알코올에 더 취약한 편이다. 음주 시작 뒤 알코올 중독에 이르는 속도가 남성보다 빠를 뿐 아니라 알코올성 골다공증, 간경화, 치매, 우울증 등 동반 질환 발병률도 높다. 직장인 김희현씨(38)는 한때 알코올 중독자였다. 심할 때는 거의 매일 소주 6병을 마셨다고 한다. 2002년에 간경화 판정을 받았다. 배에 복수가 차고 심한 영양 실조까지 걸렸다. 술을 계속 마시면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는데도 술을 끊지 못했다.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며 거의 폐인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2005년부터 술을 끊었다. 지금도 음주 유혹이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절제하지 못한다. 끊었다가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계속 마시는 것이 알코올 중독자의 습성이다. 다시는 알코올 중독자로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키친 드링커(주부 알코올 중독자)도 계속 늘고 있다. 키친 드링커란 남편과 자녀가 없는 낮 시간대 집에서 술을 마시는 알코올 중독 여성을 일컫는다. 이들은 밖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들의 음주 행태도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청소년위원회가 전국 중·고생 1만4천4백30명을 대상으로 한 ‘2006년 청소년 유해 환경 실태 조사’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술을 한 번이라도 마셨다는 청소년이 47.7%로 가장 많았다. 3~5번이 6.8%, 1주일에 2~3번은 2.3%였다. 거의 매일 음주한다고 응답한 청소년도 1.4%나 되었다.
청소년들의 음주량 또한 성인 못지않다. 1회 음주 때 평균 소주 1병을 마신다는 응답자가 10.1%였다. 또 소주 3~5잔이 26.6%였다. 소주 2병과 소주 3병도 5.1%, 3.7%였다.

 
‘음주문화상’ 공로패 준 지자체도


 
우리 사회에서 술 권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사회의 관대함에 있다. 술로 인한 실수나 잘못을 대부분 너그럽게 용서받는다. “술 한잔 마시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로 넘어간다. 술을 마시고 폭언과 폭행을 하는 경우에도 너그럽고 관대하다. 최근 대학의 신입생 환영회나 직장 회식 문화가 바뀌고 있지만 그 움직임은 미미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술 마시기를 부추기는 문화가 여전하다.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청소년의 음주 장면, 폭탄주 돌리기, 술 마시기 시합, 여성 음주 등 부적절한 상황이 자주 연출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는 공무원에게 공로패를 주었다가 낭패를 당했다. 충북 괴산군은 ‘건전한 음주 문화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 직원을 포상한다’는 취지로 각 실·과, 면사무소로부터 술을 잘 마시는 공무원을 추천받아 수상자를 정했다. 수상자에게는 ‘음주문화상’이라는 이름의 공로패를 주었다. 이런 악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범국민 절주 운동과 올바른 술 문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2000년부터 전국에 20개의 알코올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오는 2010년까지 이를 96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이 센터는 개인, 가족, 집단 상담실 등 알코올 중독 환자 및 가족을 위한 전문 상담실과 재활 치료실을 갖추고 있다. 지역의 병·의원, 복지 시설, 단주 모임 등과 함께 알코올 중독 예방 및 치료 활동을 벌인다.
이명윤 새한빛의원 상담실장은 알코올 중독자에서 치료사로 변신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술을 마셨는데 내성이 생기면서 폭음을 했고 끝내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술 때문에 변변한 직장도 하나 얻지 못했다. 가족들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폭언하는 등 증상도 심해졌다. 보다 못한 가족들이 알코올 중독에 대한 상담을 받고는 술을 끊는 계기를 마련했다. 술에 푹 빠져 있던 환자가 지금은 단주 전도사로 나섰다. 올해로 20년째이다.
이소장은 “알코올 중독자는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알코올 중독은 치료가 가능한 병이다. 단주 모임에 나가거나 알코올 클리닉 상담을 통해 치료하는 게 최선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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