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 조 철 (출판 기획자) ()
  • 승인 2007.05.2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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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훈 소설 <남한산성>/병자호란 때 청군에 쫓긴 '조선 사직의 딜레마' 그려

 
말(言)은 허공에 올라 더욱 살지고, 말(馬)은 주려서 허공을 긁으며 죽는다. 저자의 말이 달리면 독자도 다급해진다. 말들이 에워싸자 독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어떤 독자는 저자의 말들에 포위되었다가 임금과 함께 산성을 빠져나온 뒤에야 자유로워질 듯하다.
책이 세상 넓은 벌판에 나온 지 한 달이 넘었다. ‘말들의 천지’인 <남한산성>은 성문을 열고 말문을 닫는 듯했다. 저자는 책머리 일러두기에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라고 밝히며 이야기 외의 말을 아꼈고, 독자들은 그대로 화답해 말없이 역사소설 한 편 읽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독자들은 무수한 추측을 뱉어냈고, 이에 덩달아 문학 비평을 하는 내로라하는 전문가며 기자들이 앞 다투어 말들을 쏟아냈다.
그의 전작 <칼의 노래>가 영웅의 고뇌를 담은 것이었다면, 이 책은 영웅 없는 조연들의 ‘말의 노래’이다. 영웅이 없고 주인공이 부각되지 않은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가지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이 소설의 소재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조연들의 고뇌에 찬 대사 속에서, 엑스트라가 툭툭 내뱉는 말들에서조차 독자들 또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고 꽁꽁 언 산성의 다음날들을 맞는다. 독자들 또한 답답한 맘이 깊어져 다급해진다. 결말을 알면서도 책을 손에서 떼어내지 못하듯, 출성이라는 결말을 알면서도 나날을 견디는 산성 안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간다. 그러는 중에 저자는 냉혹하게 행간에 감춘 말의 화살들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독자는 산성 안 논쟁의 한가운데로 내몰린다.
이야기를 하기 앞서 저자는 ‘하는 말’에서 자신의 입장을 먼저 밝혔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신생의 길은 죽음 속으로 뻗어 있었다. 임금은 서문으로 나와서 삼전도에서 투항했다. 길은 땅 위로 뻗어 있으므로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1636년 음력 12월,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눈보라를 몰고 서울로 진격해왔다. 병자호란이었다. 정묘호란을 겪은 지 불과 9년 만이었다. 방비책을 갖추지 못한 채 척화를 내세우던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파천하려 했으나,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1636년 12월14일부터 1637년 1월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에 대한 저울질 등 참담했던 기록들을 이야기로 재구성한 것이다. 저자는 부서진 돌과 떠도는 먼지들을 모아 나름으로 산성을 복원한다. 자신만의 연장으로 빈틈 하나 없게 애써 메운 산성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굽이치고 내밀고 감추고 솟구치기도 한다.


기름기는 물론 물기까지 뺀 ‘김 훈체’의 마력


 
“지금 성 안에는 말(言) 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 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그 산성 안에서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둘은 팽팽한 긴장을 이어가기도 하고 맥 빠지기도 한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 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마음 깊은 곳을 열어 보이지 않으며 망설이는 영의정 김류,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수성이 곧 출성’이라는 헌걸찬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저자는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될 수 없다”라고 일러두었다. 하지만 저자가 복원한 산성에서 되살아난 인물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서 막 튀어나온 듯 생생한 얼굴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역사에 오르지 않은 등장 인물들 또한 생생하다. 이름처럼 강직하게 현실을 사는 대장장이 서날쇠, 김상헌의 칼에 쓰러진 송파나루의 뱃사공, 적진을 뚫고 안개처럼 산성에 스며든 뱃사공의 어린 딸 나루 등은 <남한산성>을 지금인 양 살아 있게 하는 존재들이다.
저자의 문법이나 문체 또한 화제이다. 이미 <칼의 노래>에서 그의 현란한 글 맛을 보았던 독자들은 <남한산성>에서 더욱 기름기 빠진 글들에 감탄한다. 물기까지 빠진 글이다. 그것이 매력이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형용사를 대체로 빼버린 마른 말들이 그림을 만든다. 그렇게 형용사 없는 문장이 그대로 형용사로 남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이 한 문장으로서는 형용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앞서의 문장들이 차곡차곡 배경 그림으로 쌓인 까닭에 이 마지막 문장은 그림의 중요 지점으로 ‘처연한’ 형용사로 빛나 보인다.
<남한산성>은 역사소설이다. 남한산성은 갇혔으나 저자의 글은 어떤 틀에 갇히지 않았다. 읽기에 따라서 블랙 코미디 같은 부분들도 눈에 띈다. 다치고 얼고 주려서 죽는 말들을 그린 대목이라든지, 성벽 앞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전투를 내려다보는 문신들이 관전평을 주고받는 대목이 그러하다. 출성이 임박한 어느 날 군병들이 누비옷을 벗어 이를 잡으며 성적 농담으로 굴욕의 의미를 말하는 대목도 그렇다.
저자는 <칼의 노래>를 내고 한국의 독자들과 교감을 이미 끝낸 눈치이다. 기다렸다는 듯 독자들은 찬사를 앞세운다. 제각각이나 각각의 말 뒤태를 보니 거개가 둥글둥글 살진 것이 ‘책 잘 읽었다’는 투이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고 명치가 아파왔다는 독자 또한 그러해 보인다. 한 달 만에 8만 부를 판매한 집계가 보도되고, 방송 등 매체와 인터넷 공간에서 책에 대한 평가도 각양각색이다. 한·미 FTA 상황을 빗대어 쓴 것이라는 말도 있고, 저자가 겪었던 치욕스러운 일에 대한 변론이라는 말도 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자존을 버리고 치욕을 감내하는 이 땅 중년 가장의 외로운 모습을 담았다는 말도 있을 것이다. 대선이라는 격전장을 빗대어 썼다는 말도 나올 터이다. 그러나 평론은 평론가의 몫일 뿐. 저자가 말했듯 독자 또한 이 편도 저 편도 아니다. 담담히 겨우내 갇힌 산성을 보며 ‘영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영화가 끝나면 근처 술집에 들러 답답했던 마음을 쓸어내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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