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알 낳는데 법을 두려워하랴
  • 유근원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6.2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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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채 시장 르포/합법·불법 업체 모두 ‘성황’…명동 큰손들은 ‘잠수’

최근 사채업을 소재로 한 <쩐의 전쟁>이라는 TV 드라마로 대부 시장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채 시장의 중심지로 알려진 서울 명동·강남 일대는 그런 분위기를 피부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6월18일 오후 3시 서울 명동 골목. 담벽에는 대출 관련 광고 문구가 가득 붙어 있다. ‘100% 당일 대출’ ‘무이자·무담보·무보증 대출’같이 손쉬운 대출을 보장한다는 문구가 빼곡하다. 명함 크기의 대출 광고 전단이 공중전화 박스나 길거리 여기저기에 뿌려져 있다. 정작 광고물은 넘쳐나지만 명동에서 개인을 상대로 대출해주는 대부 업체를 찾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최근 몇 개월간 정부의 집중 단속으로 명동의 미등록 대부 업체들은 꼭꼭 숨어버린 상태이다. 명동에 아직 남아 있는 대부 업체들은 등록을 하고 정상 영업 중인 업체와 개인보다는 기업체를 상대로 하는 업체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주로 기업 어음·양도성 예금 증서(CD)·비상장 주식을 담보로 장사를 하고 있다.
한때 사채의 중심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명동 길 34번지. 우리은행(옛 상업은행 자리) 건물을 중심으로 몇 개의 빌딩은 여전히 대부 업체들이 점령하고 있다. 인근에 나란히 붙어 있는 ㅎ빌딩과 ㄷ빌딩, ㅇ빌딩은 건물 전체가 대부 업체들로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피탈’ ‘컨설팅’ 등의 간판과 ‘○○무역’ ‘○○상사’라는 회사들도 사실 이름만 그럴싸할 뿐 실제로 하는 일은 대부업이다.
직장인 김종근씨(39·가명)는 대부 업체 중 하나인 러시앤캐시 서울 명동지점을 찾았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2백만원 정도의 급전이 필요해서다. 사무실은 시중 은행 창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창구 오른편에는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도록 컴퓨터가 놓여 있고 현금 지급기까지 갖추어져 있다. 손님은 뜸했다. 시중 은행과 다른 점은 1~2층이 아닌 고층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 점을 빼고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김씨는 “손쉽게 대출받을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왔다. 계약직이라 은행에서는 직장인 신용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씨가 준비해온 구비 서류를 담당자에게 냈다. 담당자는 서류를 가지고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곧 나왔다. 김씨가 2백만원을 빌리는 데는 채 15분이 안 걸렸다.
은행보다 대부 업체의 신용 대출 조건은 비교적 간단했다. 그가 대부 업체에 낸 서류는 3개월 이상 입금된 급여 통장 복사본, 주민등록등본 1통과 신분증뿐이다. 이곳에서 불과 10m 떨어진 건물에 산와머니 명동지점이 마주하고 있다. 이번에는 기자가 직접 대출 상담을 받아보았다. “직장인이다. 신용 대출을 하려고 한다. 어떤 구비 서류가 필요한가?” “급여 통장 복사본과 주민등록 등본 1통, 주민등록 초본 1통, 신분증이면 된다.”
상담을 하는 데 채 5분도 안 걸렸다. 구비 서류만 갖추면 당장 그 자리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기자가 들른 산와머니와 러시앤캐시는 일본계 대부 업체로 국내 대부 업계 1, 2위를 다툰다. 이들은 고금리이지만 은행보다 낮은 문턱과 빠른 대출이 강점이다.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에게 급속도로 파고들었다. 국내에 들어온 지 불과 몇 년 안 되었지만 그들의 성장은 빨랐다.


명동 사채업자들, 태평로·강남으로 이동
서울 명동에서 운영되는 대부 업체들은 아직 많다. 하지만 개인을 상대로 한 불법 사채 업체를 찾아내는 일은 한강에서 모래알 찾기다. 막상 찾아냈다고 해도 업체들은 오리발을 내밀기 일쑤다. 명동파출소에 근무하는 한 경찰은 “불법 사채 업체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이곳의 대부 업체 중 3분의 2 정도는 떠났다”라고 말했다.
명동에서도 가장 비싼 땅으로 유명했던 우리은행 명동지점. 이곳 관계자는 “예전에는 우리은행 실적이 전국 1위였다. 사채업을 하는 큰손들이 주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곳 지점의 실적은 전국 중간 순위에 머문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큰손들이 발을 뺐다’는 설명이다.
불법 대부 업체를 수사 중인 경찰관의 말에 따르면 개인을 상대로 한 미등록 대부 업체는 단속을 피해 강남 일대 등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끝까지 버티고 남아 있는 몇몇 업체도 최근 명동에서 벗어나 인근 삼성본관 앞 태평로 주변에 둥지를 틀었다.
경찰의 귀띔과 전단 내용을 참고해 태평로의 한 업체를 찾았다. 20평 안팎의 사무실에는 여직원이 열심히 대출 상담 전화를 받고 있었다. ‘미등록 대부 업체는 악덕 사채 업체’라는 부정적 인식이 퍼져 있지만 벼랑 끝에 몰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은 많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사정은 가지가지다. 사고를 치고 합의금이 필요해서 찾아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지 친구와 놀기 위해 유흥비를 마련하러 온 젊은층들도 부지기수이다. 서울시청 근처 기획회사에서 일한다는 박 아무개씨(31)는 “술값으로 돈이 많이 나와 카드를 돌려 막기하다가 월급으로 충당할 수 없어 대부 업체를 찾았다”라고 밝혔다.
이곳에서 대부 업체를 운영하는 양 아무개씨는 수차례 취재를 거부하다가 이자제한법 부활에 대한 의견을 묻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자제한율을 30%로 끌어내린다고 해서 음지의 미등록 업체가 양지로 나올 것이라는 정부의 생각은 큰 오산이다. 어차피 지금도 대부업법상 이자율 상한선(연 66%)을 지키면서 영업하는 업체는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
서울 시내에는 정상적으로 등록하고 영업하는 대부 업체가 6천1백30곳이 있다(2007년 3월31일 기준). 명동·종로 등 서울 중구 지역에 7백38개 곳, 강남 일대에 9백1개 곳이 있다. 강남의 테헤란 밸리를 축으로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역삼역·강남역 일대는 명동 사채 시장이 단속으로 주춤한 사이 부쩍 호황을 이루고 있다.
서울 강남역 뉴욕제과 부근. 대부 업체가 몰려 있는 이곳에는 대학생부터 직장인들까지 급전을 빌리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 대부 업체들에서 취급하는 대부 상품 종류도 다양하다. 최근에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휴대전화 등을 담보로 10만~30만원까지 소액을 빌려주는 업체마저 생겨났다. 업체 관계자는 “술값 등 유흥비가 부족한 대학생들이 주로 이용한다. 매주 1만~3만원씩을 이자로 내면 되기 때문에 소액을 대출하는 대학생들이 부쩍 늘었다”라고 말했다.
직장인이지만 신용불량자가 되는 바람에 신용 대출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 소유의 자동차를 담보로 잡히고 사채를 쓰기도 한다. 역삼동에서 자동차 대출만을 전문으로 하는 한 대부 업체는 “모든 차량의 종류와 상관없이 본인 소유면 가능하다. 대출 기간은 3개월이며 첫 달은 20%를 떼고 나머지 두 달은 8%의 이자만 내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자동차 담보 대출은 쉽게 목돈을 빌릴 수 있을 것 같은 조건이지만 큰 함정이 숨어 있다.
학습지 교사 진희주씨(가명·여·26)는 2006년 초 사채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학습지 미납 대금 100만원을 갚기 위해 사채업자로부터 1백20만원을 빌린 것이 화근이었다. 선이자 50만원을 떼이고 진씨가 받은 금액은 70만원. 월 이자 100%라는 살인적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금을 갚지 못했다. 남편의 자동차를 담보로 맡기고 다시 사채 7백만원을 빌렸다. 선이자 2백만원, 수수료 70만원을 뗀 나머지(4백30만원)를 받아 빚 3백50만원을 갚고 나니 진씨 손에는 80만원뿐이었다. 빚으로 빚을 돌려 막은 셈이다. 자동차를 담보로 각기 다른 12명의 사채 업체로부터 5백만원씩을 더 빌리면서 대출금으로 빚을 갚는 방식이다. 이렇게 8개월 지난 뒤 김씨의 사채 빚은 1억5천만원으로 불어났다. 진씨처럼 직장 여성이나 가정주부들은 불법 대출 업체의 손쉬운 표적이 된다.


 
2005년 대부업법이 개정된 뒤 불법 대부 업체들은 채권 추심 방법을 바꿨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약 폭력을 행사했을 경우 피해자가 민원을 제기하면 곧바로 불법 추심 행위로 단속을 받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따라서 법적 문제가 안 되는 선에서 전화상 폭언과 협박을 일삼는다. 대출 관련 인터넷 카페를 통해 만난 익명을 요구한 한 대부업 관계자는 “직장 여성이나 주부들에게서 이자를 떼일 정도면 돈 장사할 자격이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만만하다.
그는 “직장 여성과 주부는 협박을 가하면 가할수록 이자가 나온다는 말이 맞다. 직장으로 찾아가거나 회사에 사실을 알리겠다고 위협하는 건 기본이다. 심지어는 집에 쳐들어가 누워 버리기까지 한다”라고 증언했다.
업계 관계자는 “불법 대부 업체들에게는 특이한 속성들이 공존한다. 대부업에 한 번 손대면 결코 폐업을 하지 않는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업체 이름을 바꾸거나 잠시 폐업 처리를 하는 것은 예외다. 엄밀히 말해 어떤 상황이 와도 절대로 업종을 바꾸지 않는다. 경제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이자 폭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가 어렵다고 해서 폐업할 이유가 없다. 단속만 피하면 불법 대부업은 황금 알을 낳는 장사다. 이자제한법이 시행되고 강력한 단속을 펴는데도 불법 대부 업체들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이다”라고 말했다.
서울 테헤란로 일대에서도 대부 업체가 가장 많이 몰려 있다는 선릉역 주변. 이곳은 한마디로 대규모 ‘사채 단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불법 대부 업체들이 찾는 이른바 ‘깔세’라고 불리는 임대 전문 알선 부동산 업소들도 있다. ‘깔세’ 거래는 사무실 집기를 그대로 제공받고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는 것을 말한다. 다만 다른 월세 사무실보다 비용이 2~3배 비싸다. 임대료가 비싸지만 언제든지 치고 빠져야 하는 불법 업체들에게는 유리하다.
선릉역 부근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선릉역 주변에서 깔세를 찾는 사람들은 기획부동산 업체·다단계 회사·사채업자 등이다”라고 말했다.


공무원 5명이 6천여 대부 업체 관리
서울 시내 대부 업체를 관리하는 서울시청 생활경제과 직원은 5명이다. 미등록 대부 업체는 빼고 등록 업체만 해도 6천여 곳이 넘는다. 인원이 적은 생활경제과가 관리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정부의 단속 의지가 약하다고 해석하는 편이 낫다.
서울시청 관계자는 “관리 대상이 관리 인원에 비해 워낙 많고 대부 업계 종사자들이 거친 데다 보직 순환이 자주 되다 보니 업무 파악마저도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는 “관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하는 자본금 70억원 이상 규모의 외부 감사 대상 대부업 법인은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나머지 법인은 시·도가 맡고 개인 업체들은 각 구청에서 관리하면 좀더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경기도는 개인 대부 업체에 대해 각 구청에 일임해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도록 시스템을 바꿨다. 서울시청 생활경제과 한 직원은 “지난 5월 1백3개 미등록 업체를 모니터링해서 서울지방 경찰청에 고발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또 “지난 4월 말~5월 중순 외부 감사 대상 법인과 그 미만의 법인, 개인 업체 9곳을 대상으로 실태 점검을 벌였다. 그 결과 법을 어긴 4개 업체에 과태료를 물리고 한 군데를 등록 취소했다”라고 밝혔다.
명동에는 사채 업체가 있지만 사채에 시달리는 사람을 구제해주는 기관도 있다. 신용회복위원회는 일정 수입은 있지만 적지 않은 부채로 한꺼번에 돈을 갚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까다로운 접수 절차와 금융 기관의 최종 결정까지 1~2개월 걸린다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이 기간에는 일체의 채권 추심을 할 수 없다. 원금에 대한 이자도 불어나지 않아 신청자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 이곳에서 상담과 접수 업무를 하는 직원은 모두 40명. 전기홍 신용회복위원회 팀장은 “신용불량자가 됐다고 해서 겁내거나 소극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조언했다. 그는 “신용불량자가 인생을 새 출발하려면 좀더 적극성을 갖고 힘든 삶을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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