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에워싼 ‘인간 방탄벽’들
  • 조홍래 (언론인·전 연합뉴스 외신국장) ()
  • 승인 2007.07.16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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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 ‘폭풍 여단’ 등 러시아판 홍위병 기승…반정부 시위 진압 등에 앞장

 
과테말라시티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는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러시아의 흑해 휴양도시 소치를 결정했다. 일부 언론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노련한 외교력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과테말라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미국에서는 부시 대통령이 푸틴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욕을 먹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7월6일자 사설에서 부시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고 비판했다. 푸틴은 과테말라로 가기 전 부시 별장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부시는 전 KGB 출신 푸틴을 신뢰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푸틴에 대해서는 걱정을 한 적이 없다. 그가 가끔 듣기 싫은 말을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말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를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예스다.” 부시의 대답은 파격적이었다. 일찍이 푸틴 대통령을 그처럼 찬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답변은 러시아의 민주 세력, 언론, 인권운동가, 그루지야와 체첸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하기 위해 푸틴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이 계획은 당장 쓸모가 없으나 언젠가는 러시아를 압박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러시아도 미사일 프로젝트가 목전의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걸고 넘어져 다른 분야에서 미국의 양보를 얻으려 한다. 러시아의 언론 탄압, 분리 독립을 원하는 그루지야와 체첸의 합병 등을 미국이 묵인해달라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미사일 때문에 이런 양보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진정 러시아의 협력을 구할 분야는 이란의 핵 개발 문제이다. 미국과 러시아에 똑같이 이익이 되는 일을 위해서만 푸틴을 평가하라는 것이 뉴욕 타임스 사설의 취지다.
푸틴 대통령은 철권 통치로 러시아를 옛 소련 시대로 환원하려 하고 있다. 스탈린이 환생했다는 풍자가 나올 정도로 그의 통치 스타일은 권위주의적이다. 헌법을 고쳐 3기 집권도 노리고 있다. 자유를 맛본 러시아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반(反) 푸틴 시위가 대도시에서 잇따라 일어난다. 소련 연방으로부터 러시아가 독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7월 초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는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광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나시의 타도 대상에 미국도 포함”
‘나시’(nashi)라고 불리는 푸틴 근위대가 가로막았다. 나시는 러시아 말로 ‘우리들’을 의미한다. 홍위병을 연상시키는 이 청년 조직은 2005년 3월 푸틴 지지 세력에 의해 창설되었다. 나시의 지도자 바실리 야케멘코는 러시아에서 부활 조짐을 보이는 나치를 분쇄하기 위해 나시가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러시아가 미국의 속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나시의 과제라고 말했다. 푸틴은 얼마 전 이라크 침공을 비롯한 부시의 일방주의 외교를 나치에 비유했다. 두 발언을 연결하면 나시가 타도 대상으로 삼는 신(新) 나치에 미국도 포함된다는 말이 된다. 나시의 목적이 안으로는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밖으로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살 만하다. 러시아 민주 세력은 푸틴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민주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만든 준군사 조직이 나시라고 비난했다. 붉은 광장 집회 입장권은 친(親) 푸틴 시민들에게만 나누어준다. 나시의 기준에 따라 반 푸틴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광장 접근이 봉쇄되었다. 17세에서 25세 사이 청년으로 구성된 나시 조직원은 12만명이나 된다. 반 푸틴 시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이들이 나타나 진압한다. 이 조직이 등장하기 전 시위를 막던 경찰은 구경꾼이 되었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 거액의 뒷돈을 댄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 석유 재벌 가즈프롬 사도 말썽이다. 푸틴은 이 회사에 무장 조직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어 의회 승인을 받았다. 이 회사의 주요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푸틴의 영구 집권 음모의 일환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
푸틴은 이 밖에도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자신을 배신한 전 KGB 요원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는가 하면 유럽에 공급되는 천연 가스관을 막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부시가 ‘나치’로 전락하고 푸틴이 위대한 지도자로 둔갑한 상황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올림픽이 흑백을 전도시킨 셈이다. 부시는 미국의 국익에 필요한 협조를 얻기 위해 푸틴에 대해 좋게 말했다. 미국 여론은 독재자를 호평한 부시를 난도하고 있다. 부시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동계올림픽 개최의 행운을 러시아에 준 결정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가 이 행사를 통해 국제 규범을 준수하는 국가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지구촌의 염원이 담겨 있다. 이런 기대와는 반대로 푸틴이 소치 올림픽을 악용해 집권 기반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장기 집권을 시도할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현재로서는 후자에 무게가 더 실린다.
소치의 행운은 푸틴에게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소치 올림픽이 어느 쪽으로 작용할지는 나시의 움직임을 둘러싼 갈등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러시아에는 나시 말고도 ‘폭풍 여단’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세력이 있다. 푸틴을 반대하는 시위가 있는 곳에는 폭풍처럼 나타나는 조직이다. 나시와 폭풍 여단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의 조직이라는 추측도 있다. 반정부 지도자 일리야 야신은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같은 사태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에 협력하던 우크라이나의 독재자는 오렌지색 셔츠를 입은 군중의 시위로 실권했다. 푸틴이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나시를 조직했다는 것이 반체제 인사들의 주장이다. 나시 지도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처럼 미국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나시에 대한 푸틴의 배려는 각별하다. 나시 지도자들을 수시로 별장으로 불러 다독거린다.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 토니 브레턴은 2006년 ‘또 다른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열린 반 푸틴 행사에 참석했다. 즉각 나시 청년들이 영국 대사관 앞으로 몰려왔다. 익명을 요구하는 영국 관리는 영국 대사관 앞 시위를 러시아 정부가 뒤에서 조종했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아와 스웨덴 대사들도 푸틴의 비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통행을 차단당했다.
일부 러시아 정치 평론가들은 나시를 ‘푸틴 유겐트’라고 불렀다. 히틀러가 조직한 청년 돌격대 ‘히틀러 유겐트’를 흉내 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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