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좌측 통행, 이젠 ‘우향 우!’
  • 정락인 기자 ()
  • 승인 2007.09.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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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우측 통행하다 일제 강점기에 바뀌어…지자체 등 ‘부활 운동’ 점화

 
‘사람들은 왼쪽 길, 차들은 오른쪽 길.’ 초등학교 때부터 줄기차게 교육받고 길들여진 보행원칙이다. 좌측 통행을 하지 않으면 ‘비교양인’으로 치부되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국제행사 때마다 ‘교양인은 좌측 통행을 합니다’라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학교 복도에서도 좌측 통행을 했다. 우측으로 가면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좌측 통행을 강요받아왔다.
좌측 통행 원칙은 알고 보면 일제의 잔재이다. 우리나라는 원래 우측 보행을 했다. 1906년에 처음으로 통행법이 시행되면서 자전거나 인력거는 왼쪽으로, 사람은 오른쪽으로 다니도록 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 좌측 보행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우측 보행 원칙을 일본이 억지로 바꿔놓은 것이다. 왼쪽에 칼을 찬 일본 낭인들이 마주 오는 상대와 무기가 부딪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동차의 우측 통행은 1942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굳어졌다. 해방 후 미군정은 차량이나 마차는 우측으로 통행하도록 바꾸고 사람은 좌측 보행을 시켰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모든 차량들이 우측 통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지하철 1호선 열차는 좌측 운행을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철도를 개설하면서 좌측 통행으로 만들었다. 2호선부터는 미국 식을 따르면서 우측 통행 방식을 채택했다. 국철 구간과 나머지 구간의 통행이 뒤섞이다 보니 크고 작은 혼선이 생긴다. 지하철 노선이 X자로 꼬이면서 갖가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지하철 역사 내의 보행 질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지하철 통로가 보행자들로 뒤엉키게 되어 혼잡하다. 서로 몸을 부딪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우리 생활에서도 좌측 보행의 폐단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대부분의 시설물은 우측 보행에 맞게 설계되어 있다. 건물의 회전문은 오른편으로 통과해야 한다. 지하철 개찰구나 공항 출입구도 우측으로 회전한다. 모든 출입문도 우측으로 열게 되어 있다. 극장·편의점·박물관 등의 시설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동선이 이루어져 있다. 지역 상권의 진입로나 입구도 오른쪽 보행자를 기준으로 설치되어 있다. 제품을 진열하는 실내 동선도 마찬가지이다. 고객은 오른쪽 방향으로 몸을 틀어 왼쪽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도는 습관을 고려했다. 인기 상품이나 기획 상품 등을 오른쪽 동선에 맞게 배치하고 있다.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에 생활 편의시설도 오른쪽 중심으로 설계된 것이다.
노약자들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오른손으로 난간을 짚어가며 움직여야 안전하다. 산행 길에서 앞 사람과 마주칠 때 우측으로 피하는 것이 편하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 좌측으로 유도하는 것은 인간의 신체 특성과 반대되는 잘못된 법칙이라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우측으로 다니는데 우리는 좌측으로 통행하기 때문에 서로 부딪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우측 통행이 더 안전하고 과학적”
보행 중에 일어나는 교통사고를 줄이려면 우측 보행이 안전하다. 경찰은 1999년부터 횡단보도에서는 우측 통행을 실시하고 있다. 전국의 횡단보도에 우측통행을 유도하는 화살표를 표시했다. 보행 신호등도 대부분 우측에 설치되어 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왼쪽으로 걸으면 달려오는 차와 마주치게 된다. 반면 오른쪽으로 걸으면 차량 정지선과 보행자의 거리가 멀어져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하지만 보행자들은 우측 보행 화살표가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좌측 통행을 의식하다 보니 횡단보도에서조차 좌측 통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이 어린이들에게 횡단보도에서의 우측 통행 교육을 시켰더니 어린이 교통사고가 현저히 줄었다고 한다. 해마다 발생하는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약 70%가 보행 중 발생했다. 우측 통행을 실시한 이후 교통사고로 숨진 어린이 숫자가 2000년 5백18명에서 2001년에는 4백39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인도 보행도 마찬가지이다. 보행자가 차량 진행 방향을 등지고 보도 왼쪽으로 걸으면 우측보행에 비해 사고 위험이 훨씬 커진다. 교통안전공단은 1.6배 정도 차이가 있다는 통계를 내놓기도 했다. 우측 통행을 하면 차량들과 일정 거리가 확보되어 그만큼 안전하다. 
때문에 ‘보행자는 보도와 차도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 좌측으로 통행해야 한다’는 도로교통법 8조2항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황덕수 우측보행국민운동본부장(전 교통안전공단 이사)은 “좌측 통행을 법적으로 규정한 조항은 안전을 위해 가급적 차를 마주보고 걷는 내용으로 바꾸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우측 통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좌측 통행’이 비과학적이라고 말한다. 황본부장은 “인간의 보행은 자유롭고 편리하며 안전해야 한다. 좌측 통행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며 불안전하다. 세계화에도 역행하고, 사회적 손실 비용도 엄청나다”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좌측 통행’의 원칙을 깨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좌측 통행의 폐단이 많기 때문에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송파구는 지난 7월부터 우측 보행 부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선 우측 보행을 가로막는 시설물부터 정비하기로 했다. 또 공공기관, 지하철역, 버스정류장, 대형 유통시설 등에서 우측 보행 지장 시설물에 대해 조사와 정비를 벌이고 있다. 공공기관 계단과 출입구, 성내천 등 주요 산책로 바닥에 우측 보행 표시 및 안내판을 붙일 예정이다. 초등학교 교과서 및 도로교통법 개정을 위한 서명 운동도 진행한다. 국회에는 도로교통법상의 규정을 우측통행으로 바꿔야 한다는 내용으로 개정 법률안이 제출되어 있는 상태이다.
송파구청 관계자는 “2008년 세계보건기구(WHO) 안전 도시 공인을 받기 위해 우측 보행을 전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송파구 관내의 잠전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우측 보행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교 시간이 되자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횡단보도에 줄지어 선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기다렸다는 듯이 횡단보도를 걷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른쪽 방향을 선택했다. 지난 86년간 이어져온 ‘좌측 통행’을 갑자기 바꾸는 데는 여러 가지 무리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원칙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도 문명국가답지 못한 일이다. 이제는 ‘우측 보행’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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