꿋꿋한 소나무처럼 거칠고 강하게
  • 이재언 (미술 평론가) ()
  • 승인 2007.09.03 16: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가 홍소안이 보여주는 ‘한국화 신세계’/ 전통 재해석과 창조적 계승 돋보여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허위 학력 사건의 파장이 쉽게 잠재워질 것 같지 않다. 허위 학력 고발 사이트 같은 것을 만들어 이참에 발본색원하자는 격앙된 제안과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 문화예술계 전체가 심각한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다. 당분간 혼란이야 피할 수 없지만, 그동안 소외와 차별을 받아왔던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게 생각되는 점도 없지 않다. 사실 예술가의 자존심과 긍지를 가지고 간판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창작의 정진을 통해서만 보람을 얻고 있는 작가들이 훨씬 더 많다. 물론 그런 작가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소개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러한 이슈 자체가 대단히 조심스럽고 예민한 사안인 것은 분명하다.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당당하게 차별을 극복하고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학력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기 때문이며, 또한 교묘한 반사 이익을 노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태와 동떨어진 채 창작에 정진하는 화가 한 사람을 소개해 볼까 한다. 바로 ‘소나무 작가’로 알려진 한국화가 홍소안(49)이다. 그는 대학 학력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전라도 시골에서 혈혈단신으로 올라와 오랜 세월 동안 독학과 창작에 고독하게 정진해온 결과, 자기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일구게 되었으며 작가의 중년에 이르러서야 크게 빛을 보게 되었다. 특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린 소나무 그림을 발표한 2000년 이후 작가의 위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본격적인 인정을 받게 된 작가는 개인전만도 무려 11회나 연 베테랑이다. 언론에서도 그를 ‘소나무 작가’로 부를 정도로 그의 소나무 그림이 독보적인 위상을 갖게 되면서, 수많은 애호가를 확보하고 있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한국화가치고 소나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시골에서 자란 작가의 경우 더더욱 소나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그의 삶 자체가 소나무의 식생과도 닮아 보인다. 서울 인왕산 자락 부암동에 작업실을 둔 작가는 소나무와 삶을 같이하고 있다. 오랫동안 작가는 화폭에서 소나무가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기 위해 부단히 많은 실험을 해왔다. 작가가 다른 작가들의 그림들과는 상이한 자기만의 화면을 일구어낸 것은 오랜 방법적 탐구와 실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포의 전면에 바틱을 응용한 호료(풀)를 발라주고, 그것이 마른 후 구겨서 많은 크고 작은 크랙을 내주게 되는 데서 그의 작업이 시작된다. 그런 다음 배면에서 먹을 설채(設彩)하여 스며들게 함으로써 전면에는 뉘앙스가 풍부한 담묵의 크랙 선들이 자연스럽게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효과는 소나무 이미지의 재현에 최적의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두터운 마티에르를 이루고 있는 호료의 층이 종래의 동양화에서는 볼 수 없는 거칠고도 강인한 표현을 가능케 하며, 또한 배면으로부터 스며온 먹이 담묵의 예리한 패턴을 형성함으로써 여백의 단조로움까지 극복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또한 이미지 재현에 관건이 되는 침엽과 줄기의 껍질 자체가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만의 유니크한 방법적 화면이야말로 소나무가 가지고 있는 불굴의 기상과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할 수 있는 절묘한 조건이 되어준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아무튼 작가는 그동안 바틱 방식의 마티에르를 통해 인왕산의 사계와 다양한 표정의 소나무를 표현할 수 있는 원숙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제 좀더 자유롭고 추상적인 조합의 화면까지 가능한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한국화가들이 즐겨 구사하는 소재들의 조합과 유사하게 작가 역시 소나무와 함께 하는 소재의 조합을 자연스럽게 만들어간다. 소나무와 바위, 소나무와 성벽, 소나무와 정자 혹은 농가 등의 조합 속에서 조형적인 시너지를 얻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외관상 홍소안의 그림은 종래의 한국화와는 다른 점이 많다. 두터운 광목에 마티에르가 거칠다 보니 작가의 그림은 오히려 육질이 두터운 유화처럼 보이며, 또한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는 멀리서 볼수록 효과가 난다. 한 눈에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미지이기보다는 관조를 통해 체험되는 은유적인 화면 질서와 여백미와 품격을 강조하는 문인화적 근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소나무라는 소재도 그렇거니와, 한국화 안료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화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 불화에서 많이 썼던 배채(背彩, 화폭의 뒤에서 설채하는 방법)라는 기법을 도입하여 독창적으로 응용한 점, 내면을 그려낸다는 사의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등이 장르적 정체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한국화의 기본적 요건을 버렸다기보다는 오히려 한국화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적 패러다임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화의 진로와 미래의 정체성도 대단히 유동적이다. 실제로 한국화에서 정체성 혼돈의 사례는 자주 목격된다. 한국화의 외형적 근간을 해체해야만 현대성이 담보된다는 식의 과격한 경우도 없지 않다. 하기는 요즘 어떠한 실험과 도전이든 그럴 듯한 이론을 대입시키기만 하면 안 될 것도 없는 세상이다. 그에 비해 홍소안 작가는 전통을 재해석하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계승해나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한국화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바로 그 점이 오늘의 작가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작가의 실험은 의미를 갖는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적으로 변용해나가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한국화, 아니 우리 예술의 미래적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오늘의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 어떤 변화를 모색하는 작가들이 대단히 많다. 하지만 자체의 내면적 조건이나 미학적 근간을 소홀히 한 채, 변용만을 목적으로 할 때 우려되는 실패가 적지 않았다.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작가 자신의 심미적 가치에 충실함으로써 그림의 ‘우리다움’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홍소안 작가의 모색은 유행적 차원의 퓨전이 아니라 작가의 삶과 미의식에 충실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구현된 성취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필자가 어느 사법기관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 작가의 거대한 소나무 그림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마치 애국가 2절을 눈으로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당당하고 늠름해 보이면서도 나그네에게 안식을 주는 것 같은 넉넉함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무언가 장소와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 왜 이 작가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물론 소나무는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소재이다. 하지만 소나무 특유의 특징들을 이 작가만큼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는 많지 않다. 투박한 듯하면서도 품격이 절로 느껴지는 재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